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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이 있는 예술촌투어 "예술촌이 빚어낸 감성리더십"

지난 12월27일  1월3일  1월28일

몹시도 추운날씨에도 불구하고   3번의 골목해설을 맡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창동오동동 상권활성화재단에서 경남대학교 평생학습연구센타에 의뢰하여창동과오동동, 어시장에 숨어있는 예술과 역사를 현장을 함께 다니면서

 ‘해설이 있는 골목여행’. ‘예술촌이 빚어내는 감성리더십’, ‘숨은 문화역사의 길을 가다’,

  ‘식신로드! 낭만의 어시장’ 3가지 코스를 기획해 코스에 따른 전문 해설사와 아동·청소년들이 함께 골목골목을 누비는 투어 프로그램이었다.

30개교 170여 명의 학생들이 신청을 마쳤으며 지금까지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참여한 아이들은 창동예술촌작가들에게 체험을 할수 있는

프로그램을 사전에 예약하여 골목투어를 마치고 나면 작가와 함께

직접 작품을 만들어보는 체험과 완성된 작품을 가져갈 수 있어 매우 만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10곳의 이야기 장소를 만들어서 아이들을 골목으로 안내한다.

가장먼저 창동조대감 앞에 설치되어있는 붉은 조형물앞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간다

 

1.문신의 개미조형-

 

▲황금당지나 왼쪽골목입구를 지나면 한눈에 보이는 붉은 조형물... 문신선생님의 개미 조형물

 

문신선생은 평생을 개미처럼 일하셨고 예술을 사랑하는 열정이 대단하셨던 분이었다.

작고 전까지 개미를 테마로 잡은 것을 보면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이 개미 형상을 끊임없이 연상시키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작가의 어릴 적 성장 배경과 결부시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문신은 마산에서 보낸 유년시절 개미를 비롯한 곤충의 생태 관찰,

동물세계, 바다의 세계 등 자연의 관찰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으며 잠재되어 있던 그러한 어릴 적 경험이 작품 속에 자연스레 묻어나고 있다.

작가의 노트에 따르면 이 작품이 처음 완성됐을 때는 제목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작품제작 후 그의 작품을 구입한 한 여성에 의해

당시 파리에서 4개월간 상영되던 개미를 비롯한 곤충과 벌레의 생태를 다루는 기록영화에 대해서 듣게 된다. 그리고 그 영화 중 개미떼의 습격에 대한 부분을 인상 깊게 본 문신은 자신의 작품이 개미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로써 작품을 '개미'라고 이름을 붙이게 됐다.

<개미>는 문신작품 중에서도 유독 대중의 많은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다.

1968년 처음으로 나무로 개미를 제작한 후 브론즈, 스테인리스]

스틸 등 다양한 재료와 크기로 개미연작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2. 보존이 시급한 남저 이우식 선생님집

 

오락실앞을 지나면 19번 김창수 창동갤러리를 만날수 있다. 그림도 감상하고

바로 골목입구앞 상상의 날개에서 사진을 찍기도 한다. 

 

▲ 저 뒤에 보이는 고딕양식의 하얀목조건물형태...지금은 옛모습만 그대로일뿐,,

조일당 사장님의 모친이 살고 있기에 손을 많이 봤다고 합니다.

 

중성동136번지..골목으로 들어서다보면 고딕양식을 본 딴 2층 목조 기와집이있다.

이 집은 남저(南樗) 이우식(李祐植: 18911966) 선생이

대지 260여평에 정남향을 보고 지은 저택에 한동안 정착함으로써 마산과 깊은 인연을 맺어 정착한 곳이었으나, 해방 후 초대 부산의대 학장에게 넘기고 마산을 떠나고 말았다. 지금은 (조용봉) 전 남마산 라이온스클럽 총재가 거처하면서 원형을 유지하려고 무척 애쓰고 있다 한다(현재, 조일당대표의 모친 거주) 3.15의거 당시는 총상을 입은 청년.학생들이 응급치료를 받았던동병원이기도 하다.

구한말에서 해방될 때까지 경남에서 으뜸가는 이른바 만석꾼이었던 것이다.

그는 항일운동에 적극 가담한 민족주의자였으며 우리글 살리기와 인재양성에도 공헌하였기에

 향토문화사업가로서 크게 부각된 인물이었다.

또한 마산의 원동(元東)상회를 운영한 탁월한 경영인이요, 경남은행 역임한 금융인이기도 했다. 특히 국내유력지 중외일보(中外日報)의 사주로서 언론의 비판기능을 강화시킨 올곧은 언론인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유복하게 자란 남저는 향리에서 한학을 익혔으나 이미 개화에 눈을 떴기에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에서 수학,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인텔리가 되었다.

귀국한 즉시 3.1운동 때 의령.함안의 만세시위를 배후에서 지원. 재력가로 널리 알려진 남저는 국내 유력일간지인 중외일보를 맡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남저가 남긴 업적 중 가장 큰 발자취는 조선어학회에 온갖 열정을 쏟았던 일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극로와 의기투합하여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에 착수한 것은 특기할 일이다. 편찬사업을 하는 동안 편찬자금 16140원과 기관지 발행에 1050원을 투입했으니 말이다. 당시 종로3가 집 한 채 값이 3000원 이었으니 집 여섯 채 값을 몽땅 희사한 셈이다. 한글을 빛낸 인물..

특히 마산에서 값진 일은 뭐니뭐니해도 원동상회에서 활약한 일이다.

원동상회는 부산 백산상회와 쌍벽을 이룬 무역회사로 마산 토박이 옥기환.명도석 등이 경영해 오다 이들이 남저를 영입하자 영업이 아연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 고장에도 남저의 저택을 원형을 살려 복원해.현대 역사관으로 삼는다면 마산의 위상과 존엄은 더욱 높아지리라 확신한다. (경남도민일보 참고)

 

3.낙동양조장

▲붉은 벽돌굴뚝과  공장과 숙소의 옛모습이 남아있지만,,, 양조장이었는줄 전혀 몰랐다.

1932년이후 80년동안 운영을 했던 낙동양조장....옛모습의 양조장을 만들어본다면 새로운 볼거리가 될것 같다.

 

탁주, 약주는 소위 우리 한민족의 국주로서

구 한국시절에는 가가호호 임의로서 양조 하였으나, 일제의 침탈기에 주세를 걷을 목적으로 개인 막걸리 양조장을 면허제로 하였다.

1928년에 당시 마을에 하나씩 있는 막걸리 양조장을 통합하여 당시 6개의 양조장이 면허를 내어 새로운 막걸리 양조장으로 출발하게 된다.

 

합자회사 낙동양조장 -마산부 표정(중성동) 130번지에서

1932128일 자본금 5천엔으로 설립하여 탁주를 생산 판매했다.   회사대표는 이달영

 

'낙동 양조장'의 현황 - 이 건물이 있는 장소는 창동 학문당서점 후문에 면한 골목길로 약 25미터 정도들어가다보면 좌측에 면한 건물이다.

안산도예공방 옆에 철대문이있다. - 지번도를 보면 원래의 필지인 중성동 130번지는 주변 필지에 비해 상당히 큰것으로 보아서, 당시에 공장의 규모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한 필지내에 여러동으로 증축되어져, 전면은 점포로, 그리고 대문 안쪽에 있는 공장과 숙소동은 다가구주택으로 개조된 듯 하다. - 지금의 상태로 건물의 원형을 추정하기는 힘들지만, 굴뚝이 있는 건물은 양조장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같다.

- 막걸리 양조장의 건축적 가치는 굴뚝을 제외하고는 달리 보존할 요소들이 없을지라도, 이 건물이 마산지역 근대기에 있었던 막걸리 양조장이었다는 장소적 상징성을 부여한다면 뭔가 근대기의 추억을 담아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 낙동양조장이 1932년에 만들어진 이래로 80년의 역사를 고이 간직한채, 도시재생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허정도와 함께 하는 도시이야기)

 

 

4. 바디페이티스트 배달래

 

 

이 작가는 특이하게도 인간의 몸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배달래는 마산사람이다. 마산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성신여대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성신여대 서양화가에서 강사로 재직하기도 했던 그녀는 성신여대 아트디자인대학원에서 메이크업 특수분장을 전공했다.

3번의 개인전과 수차례의 단체전을 가진바 있는 그녀는 20년 만에 대학시절부터 소원했던 바디페인팅의 세계에 빠질 수 있었다.

 그녀는 대학 3학년 때 처음 본 베르슈카의 바디페인팅 사진집을 보고 강한 충격을 받았으며,

바디페인팅 예술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베르슈카를 만나 그를 멘토로 삼아 벌써

국내에서는 수 차례의 공연으로, 전시로 독보적인 예술가이다.

 

5. 김은진보리도예

 

 

 

김은진작가의 항아리 이야기가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수 있도록 설명을참 재미있게 한다

주둥이 좁고 엉덩이 펑퍼짐한 도자기.

남근처럼 우둑 솟은 도자기. 아랫굽이 훌쩍 높은 도자기 ,복을 부르는 처녀 항아리.

복을 담는 아지메 항아리. 근심걱정을 담아두는 걱정항아리 .....

우리네 조상들은 이런 다양한 모습의 항아리로 장식은 물론, 액을 막고 복을 담는 정성과 기원을 담았다 한다김은진작가에게 방문하면 도자기의 이야기를 맘껏 들을 수 있다.

 

 

6.  보헤미안 현재호벽화

현재호 작가는 1935년 부산에서 태어나 1981년 마산에 정착했고

2004년 삶을 마감했다. 주로 부산 자갈치시장, 마산 어시장을 배경으로 한 아낙네의 모습을 그렸고 투박하면서도 정감이 가는 그림을 그렸다.

 1935년 부산에서 출생한 현재호 작가는 부모님의 불행했던 관계로 두 살 때 26세의 나이 차이가 있는 누나 현미씨를 따라 만주, 북경, 대련, 상해 등지를 떠돌다 해방 이듬해 당시 아버지가 계시던 부산에서 정착하였다. 고교를 졸업할 무렵 친구로부터 우연히 빌리게 된 고흐의 판화집에서 본 '해바라기', '밀밭과 까마귀' 등의 작품은 그를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뒤늦게 화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독특한 스타일로 민주신보사가 주최한 최초의 민전에 4회 연속 특선을 차지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걸어갔다. 하지만 그림 그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던 그는 방랑의 삶을 살게 된다. 부산, 대구를 비롯해 전국 방방곡곡을 방랑하던 그는 1981년부터 마산에 정착하게 된다. 마산 예술계의 따뜻한 온정과 마산 어시장의 푸근한 풍경이 그를 마산에 머물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들을 보는 순간 낙천성과 인간사에 대한 애정이 강하게 느껴졌다. 마산 어시장에서 장사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을 주 모티브로 하고 있는 그의 그림은 단순하고 투박한 형태들이 화면의 중심에 배치되어 있지만 단절된 것이 아닌 함께 호흡하는 인간 군상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눈을 감은 듯 보이는 시장 아낙네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비롯한 시장 상인들 삶의 애환을 드러냈다. 파스텔 색조의 부드러운 색감, 단순화된 인물형상과 화면 구성은 인간사에 대한 정감 어린 시선을 보여주었다.    - 경남도민일보

 

그냥 지나칠수 없는 마산의 옛 흔적,,,지나는 길목에 현재 남아있는 오프라인 서점 학문당에 대한

 옥호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58년째이어가고 있는..권화현대표의 작고하신 부친의 사진... 아버님의 호가 <문당>이었는데

사람은 늘 배워야한다고 학문당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하였음을...이야기하고 있다.

 

▼창동허새비 이선관시인

마산만의 오염됨을  시사하고 있으며,1970년대우리나라 최초의 환경시 '독수대' 를 발표.

이따이이따이..바다가' 아프다아프다' 는 뜻

 

7. 그랑쇼미에르 서혜주 <식물과 회화의 만남>

 서혜주 작가는 원예치료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왜 원예치료에 관심이 있냐고 물었더니 본능의 문제라고 답합니다.

  식물을 만지든 물감을 만지든 두 개가 하나되어 식물도 회화로 보이고,

  페인팅도 식물로 보게 된답니다. 이 때문에 작품 바탕색은 숲이라고 합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숲 위에 집이 있고 집 위에 숲이 있습니다. 작가의 그림 내면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 환경 문제 해결을 갈망하는 모습이 표현돼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사람들에게 전달을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작업을 하신다고 합니다.

특히,붉은 바탕의 물감은 자연 물감인 분채를 많이 사용하는데,특별한 느낌이 들어 좋아한다고 합니다

'아카데미 그랑쇼미에르'100년이 넘는 전통의 순수미술 사립예술교육기관.

미술데생,크로키를 가르치는 순수미술 .파리 유학을 가려고 많은 유학생이 거쳐 간 예술아카데미이다.

 

 

8. 아카데미 뒤폐 '하니스토리' 윤귀화

 

 

아카데미 뒤페'는 문신이 파리 유학 초기 회화 강사로 일했던 곳..

  윤귀화 작가의 작품에서 빠지지 않는 소재는 ''이다.

"2000년부터 승마를 했어요. 승마체험을 한다고 학생들과 승마장에 갔는데오히려 제가 승마에 빠지게 됐죠.

말을 만나지 않았으면 지금의 제 작품도 없었을 겁니다"고 윤 작가는 설명했다. 그는 지금 경상남도 재활승마협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윤 작가는 지난 2008년 열렸던 두 번째 개인전부터 '하니 스토리(hani story)'를 썼다. 하니는 그의 말이다. 매번 그의 작품에 등장했다. "애마 하니를 통해 저의 내재된 삶을 표현했어요. 하니는 저 자신이면서 관람객일 수도 있죠"라고 윤 작가는 말했다.

그의 작품 속에는 말의 신발인 편자도 있다. 삶의 흔적과 희망을 표현하고,

관람객과 희망을 공유하고 싶은 그의 마음이 녹아있다. 작품은 대부분 화려하다.

검은 바탕의 알록달록한 빨주노초의 색감은 검은 하늘의 불꽃놀이처럼 화려하다.

하늘의 박자에 맞춰 땅에서 선인장, 화초 등 오아시스의 생물체들도 몸을 들썩인다. 사랑과 별, 왕관, 비둘기, 백마, 크리스마스트리 등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에서부터 꿈과 상상의 장면은 작가의 자신감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윤 작가는 "내 작업의 주제는 'I Can Fly'이다.

그곳에 나의 끈질긴 작업의 미학을 둔다. 날고 싶고, 살고 싶고, 이루고 싶은 모두를 담고자 한다"고 밝혔다.(경남도민일보)

 

9. 파리화실 임수진

 

'파리화실'은 문신의 개미시리즈 작품이 만들어진 곳입니다.

임수진 작가의 그림특징은 온통 선이다.

파리유학시절...공부하는 과정에서 리좀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그러한 의미들을  그림으로 나타내고자 마음먹었다고 한다, 현대의 삶의 온통 웹으로 연결되고 있다..관계.....

복잡네트워크에서 어떤 행동방식을 보일 것인가에 대한 밑그림을 처음 그린 사람은 들뢰즈가타리이다. 그 두 사람이 창안한 리좀이라는 개념이 그것인데,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연결망을 표현한다.

그물망처럼 연결된 연결망인 리좀은 어떤 것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땅 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땅 밑에서는 감자, 개밀, 고구마 등의 덩이줄기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두더쥐들의 미로와 같은 땅굴이 얽혀 있다지렁이도 마찬가지다.

복잡한 미로처럼 얽혀 있는 그물망, 매듭과 선, 점들이 이어져 선을 이루고 선들이 마디마다 얽혀 들어가고, 매듭들이 실타래 풀리듯이 뻗어나가고, 끝없이 전개되는 선들의 갈림길,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매듭이 있는데 그것도 중심이라고 할 수 없는 연결의 일부일 뿐인 연결접속의 연속,

……그리고……그리고.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복잡한 미로와 생명의 네트워크가 리좀이다

 

 

10. 이야기갤러리 하모하모 박영경

토우를 시작하게 된 것은 어린 시절 의령에 있는 외갓집을 방학때 면

외할머니와 놀았던 단편적 기억들이 항상 머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고 하며

미대를 가려고 하다가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하였다고 합니다.

 

1996년 이승은 허현선의 부부작가의 엄마 어렸을적에라는 주제를 가지고

한지를 소재로 인형전 전시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게하고

잔잔한 정서를 전해주었던 것을 보고

박영경작가도 15년 전부터 흙 인형을 만들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로부터 배운 적이 없다고 하니 더욱 놀라웠습니다.

 

첫 작품은 단품으로 시작했으나

지금까지 계속된 작품의 특징은 꼭 12점씩 스토리로 엮어 작업을 한다고 합니다. 왜냐면 우리나라의 정서, 옛 시절의 이야기 이고, 달력을 의미하기도 하는 작은 흙 인형이야기는 중. 장년층에는 아련한 추억처럼 지금세대에서는 한편의 동화같은 이야기에

모두들 하모하모 맞다, 우리 어릴 때 저랬다 아이가..” 모두들 잊혀져 가는 기억을 되새기며는시간을 가질수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