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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의 전설 쪽샘

△ 양해광 사진

창동 고려당 거리에서 예술촌으로 들어오는 초입에는 쪽샘골목이라고 부르고 있다..

80년대 전설 같은 쪽샘이 있어서 인가...당시 골목 안에는 동동주 가게가 골목 곳곳에 있었다.

이야,,,,이야,,,,,이게 언제 쩍 사진이고,, 입가에 반가운 미소가 연신 맴돈다.

내도 오늘 이 자리에 나올라꼬 옛 앨범을 뒤적여 보다가 명함이 있더라 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정말 감회가 깊네예..간판을 가만히 들여다 보더니,,여기 사진은 80년 중반쯤 되겠네요

창동분식도 원래 이자리가 아니었는데 위 골목에 올라와 있는 것도 그렇고

간판을 보니 두자리 전화네요. 처음 시작했을 때가 79년도였습니다

22112으로 시작한 번호가 80년대 후반에 46국으로 바뀌었고 90년대에는 246국으로 변경되었

던 시절이었다 아임미까....

2-2112 ..백색 전화였지요. 그 당시는 전화번호를 서로 주고팔고 하던 시대였고 전화 한 대 가격이

무려 180만원이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잊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보이시더

 

먼저, 전화번호 이야기를 해볼까예~

 

우리가게 번호하고 롯데크리스탈 번호하고 헷갈려서 있었던 이야기임미더.

지금 마산의료원 신축으로 변해버린 옛 마산시 장군43-6

80년대 일본계 등 외국 기업이 마산수출자유지역(현 자유무역지역)에서 호황을 누리던 마산 부흥기에는 마산·창원지역 대표 호텔로 각광을 받아 객실은 빈 곳이 없었고 식당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던

롯데 크리스탈 호텔(798월인수) 대표 전화번호가 2국에 1112 (45-1112. 2001년 폐업) 였습니더.

 

한창 인기가 있었던 숙박시설과 나이트클럽에 외국사람들의 이용이 많았던 지라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는 00~` (거기 롯데 크리스탈인가요?) 암튼 이 번호 때문에 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습니더.

그래서 220만을 준다고 팔아라는 제의도 받았지만

돈을 얹어 준다고 해도 내가 팔수가 있겠습니까 .

나도 전화 하나로 장사를 다했던 시절이었는데 대표 전화를 팔고 나면 장사를 못한다고 당연히 생각했었지예. 손님이 미리 와서 앉아 있으모 친구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전화가 오면 손님들을 바꿔주고 했으니까 전화가 없으면 장사를 할 수 없었습니더.

 

어떻게 쪽샘 가게를 하게 되었슴미꺼~

 

우연하게 가게 임대가 나와 있는 걸 보고 알아보니 천만원 보증금에 월세 백만원이더라구예. 처음에는 겁이 나서 친구하고 내하고 둘이서 동업 할라꼬 마음먹었는데 아부지가 사실을 알고 동업은 절대 하지말라고 엄포를 놓아서 고마 각자 하기로 했습니다 마침 위쪽 건물 (다다)과 아래(쪽샘)건물이 나란히 나와 있었는데

나는 어느 곳을 선택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친구가 먼저 위 가게를 선택했습니더. 그래서 자연스레 나는 아래 지하 공간을 하는걸로 했었지예. 인테리어 시설도 같이 하고 개업은 며칠 사이를 두고 각각 장사를 시작했습니더...

다다 김용해. 아주 장사에 감각이 있는 친구였슴미더.

수출자유지역과 한일합섬이 한창 잘나가던 시절, 시내 곳곳이 젊은이들로 넘쳐나던 바로 그 시절 그 때는 돈을 몰라 가지고 내가 그렇게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지예 돈을 셀 시간이 없었습니더. 찌르릉 소리나는 파란 금고가 있었는데 돈이 불룩하게 올라와서 문을 닫을 수가 없어서 쌀 포대에 돈을 넣어놓고 또 넣고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그 생각을 하면 엄청난 시절이었지예. 인자는 그런 날이 안 올낌미더

 

전두환 정권시절 야간통행금지가 있을 때 아임미꺼~

12시만 되면 술꾼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울렸던 공포의 사이렌 소리에 달리던 차도, 상점의 불빛도, 취객의 발걸음도 일순간에 사라지면서 온 동네가 갑자기 정적이 감돌면서 골목 가게마다 기능은 한마디로 올 스톱 되고

개미라도 한 마리 얼렁거리면 길 저쪽에서는 사정없이 호루라기를 불어대고 미처 가게 문을 닫지 못한 상점은 그 소리에 놀라 정신없이 셔터 문을 내리고. 방범대원과 경찰의 눈을 피해 두더지처럼 뒷골목을 돌고 돌아 귀가 길을 재촉하던 시절아임미꺼 불빛이 새 나가지 않구로 커텐을 막고 방범대원들을 먹여가면서 숨은 이야기들도 많았습니더.

 

우리가게도 일단 12시까지 장사하고 나면 청소도 해야 하고 집에 갈 때 돈을 챙겨 가야하기 때문에 방범대원들에게 돈을 쫌 주면 보디가드처럼 집으로 가는 동안 보호해주기도 했습니더.

부림시장 모퉁이 한국투자신탁이 있었습니더. 현금 1억을 맡겨놓았는데... 부모님 계신 집이 남지였는데 제사지내러 가는 날이면 항상 지점장이 직접 차를 태워주고 했습니더 ,,

 

그때는 돈의 중요성을 몰랐습니더. 날만 새면 돈이 들어왔으니까 말임미더.

우리가게 쪽샘은 DJ만 없을 뿐이지 음악실만 작은 것을 마련해서 항상 음악을 틀어줬습니더. 그때 가장 인기 있었던 손님들의 노래 신청곡이 뭔지 암미꺼~ 전인권의물 좀 주소였습니다. 원래는1974년 발표한 포크가수 한 대수가 만든 곡이지예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마르요 물 좀 주소

술 좀 주소 술 좀 주소 목마르요 술 좀 주소

 

위 골목에 송강정이라고 유명했던 막걸리집이 있었는데 창동에서는

우리 가게하고 두 곳이 아주 유명했슴미더. 송강정은 동동주가 오리지날이었고 우리가게 동동주는 가리지날(가짜)이었습니더. 손님들이 달짝 그리하이 억수로 맛있다고 했는데 사실은 북면 막걸리를 사가지고 와서 단술을 타서 조제했던 술이었슴미더. 우리 모친이 단술(식혜)을 굉장히 잘 담았지예.

가게밖에 빈 박스를 산더미처럼 쌓아두면 주변 사람들이 내보고 하는 소리가 하루에 우째 이리 막걸리를 많이 팔수 있노하고 늘 이상하게 생각했슴미더. 송강정은 동동주가 너무 독해가꼬 많이 먹지도 못했지만 우리가게 동동주는 내가 무~봐도 억수로 맛있었습니더. 내보고 비법을 알려 달라고 물어보는 사람도 많았슴미더.

동동주는 배합이 중요하지예

단술을 많이 타도 안 되고 작게 타도 제 맛이 안 나오거든예. 하하하하

막걸리가 굉장히 땡기면서 단술까지 타놓으니까 여자들이 굉장히 좋아했다.

다른 가게 동동주는 밥알이 허리멍텅하게 푹 퍼져 있는데 쪽샘 동동주는 단술밥알은 통통하게 떠 있으니까 이야~이거 쥑인다 우찌 담은기고 하고 서로 물어봤슴미더.

  안주도 정말 맛있게 잘 했었지예.그 맛을 따라올 곳이 없었슴미더.

지금은 매립되었지만 옛 홍콩빠 옆에 있었던 잠수기 조합에 아는 행님이 있어가지고 경매 받은 낙지를 바로 들고 와서 쪼사 놓으면 싱싱하게 살아있는 것을 해놓으니 얼마나 맛있겄슴미꺼

그라고 죽은 거는 양이 줄어드는데 살은(살아있는) 거는 촉감이 아주 좋았다. 주방 아줌마가 양념을 숙성해서 잘 버무리 놓으면 동네 사람들도 저녁때가 되면 냄비를 들고 와서 반찬 한다고 사가지고 가고 했슴미더.

점심때도 냄비 들고 오는 사람들. 아뭏던 낙지볶음은 엄청나게 많이 팔맀슴미더.

  기억에 나는 손님이 있겠네예~

보통 술집은 오후5시에 문을 여는데 우리 가게는 아침10시부터 손님이 왔다.시장을 9시에 보고 10시쯤이면 일하는 사람들과 아침밥을 먹고 시작하는데 그때부터 학생들이 땡땡이 치고 오는 기지예 대학생이 참 많이 왔슴미더

그런데 학생들이 첫째 돈이 없다보니까 주민등록증, 시계. 책을 맡기고

술을 많이 먹었슴미더. ㅎㅎ이만기도 외상값 굉장히 많았는데 ~하고 사장님의 말이 떨

어지자 마자 아직도 안 갚았지예 하고 물었더니 맞슴미더 안 갚았슴미더.”그라고 우

리가게는 씨름선수들도 많이 왔습니더. 그때는 돈이 다들 없었던 시절이고 어려웠다 아

임미꺼.,

다다는 사실 쨉이 안 되었슴미더 장사가 잘 안되더라고예. 초창기는 막거리를 팔지 않았는데 우리 가게랑 같이 막걸리를 팔아보고 하더니만,,,,

우리가게는 오직 동동주 하나만 가지고 장사를 다했슴미더

안주가 굉장히 많이 나갔지예 우리집 안주를 먹기 위해 온 손님도 엄청났슴미더.

 

우리 가게가 인연이 되어 가꼬 결혼한 팀들이 많았슴니다.

다다는 테이블이 잘 짜여져 있어 스킨십하기가 힘들었지만

우리는 손님을 많이 받을라꼬 좁게 배열했다

지하 작은 공간이었지만 테이블에 전부 앉으면 40명 됨미더.

하도 손님들이 들어오니 둘이서 딱 붙어서 먹을 수밖에 없었지예

한잔 먹으니 그 당시 대나무로 장식한 다마(백열전구) 불빛아래 보모 얼매나 아가씨가

이뻐보이겄슴미꺼. 분위기까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짝(인연)이 되가꼬 결혼소식을 알려줘서 결혼식에도 5군데나 갔었슴미더.

 세월이 흘러 우연히 길에서 한 팀을 만났는데사장님,,우리가 쪽샘에서 만나 결혼했

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던 사람도 있었습니더

 

왜 쪽샘이란 이름을 지었슴니꺼~~..

 

경주에 가면 쪽샘 지역이라고 있었다. 그 당시 쪽샘이라는 이름의 느낌이 좋아서 가게

이름을 쪽샘이라고 간판을 달았다.

그 당시 막걸리집들이 아바이 맥주 빈 병에 막걸리를 부어서 팔았었다.

그런데 나는 로구로(나무로 깎은)로 만든 통에 쪽 바가지를 담가 주니

운치가 있다 아임미꺼. 로구로 잔이 참 예뻤었지예. 그런데 오는 손님마다 기념으로

가져 가삐가꼬 술잔도 쪽도 하루에 100개도 없어졌슴미더..

쪽을 제공해주는 집이 온 동네 전체가 조롱박 농사를 지었고 짓는 대로 다 주라해지예

 모양이 예쁜 게 굉장히 많이 나왔다. 술이 추가되어야하는데 쪽자가 추가 주문이 되고

했슴미더

그리고 술값 매상이 엄청 났슴미더 1통에 800원 안주 1천원

하루 매출이 70만원, 80만원이었다. 이 동네에서 제일 손님 많다고 소문이 났었다 하옇던 가게 문을 열자 말자 손님들이 몰려와서.

엉망진창으로 장사했슴미더. 손님이 계속 들어오니 우찌 장사했는지..

아침에 눈을 뜨면 어휴~ 오늘은 쫌 손님이 안 와야할낀데 하고 생각했다카모 말다핸거

아임미꺼 참말로 감당이 안 되었던 시절이었슴미더.

 

특히 시민극장,강남극장.태양극장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이 물밀 듯이 내려오면 감당이

 안 되었던 시절.사람들이 내가 하고나서 막걸리집이 몇 군데 생겼었다,고구려.영일레

븐 목선,.지금하고 다른 아나로그 시대. 밥먹고 술마시고 커피샵도 많았지만 주머니 형

편도 안좋았으니 커피숍도 안 그치고 바로 1차부터 우리 가게로 왔다. 

이 골목을 그 당시 창동 새 골목이라고 불렀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면예~,,

그 당시 정말 이 여자하고 밤을 같이 지내고 싶은데 돈이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예? 하고 물어보니 오데 방이나 있슴미꺼 방을 빌리 준 게 아니고 그냥 가게서

 하룻밤을 자게 했다. 그 대신 조건을 제시 하는데 가게청소를 말끔히 해놓겠다고 하여

 가게서 잠을 자게 한 경우도 많았다...

더 중요한 것은 가게가 지하라보니 쥐가 있었다 그 친구가 하는 이야기가

사장님예~ 같이 누워있는데 쥐가 댕기가꼬 얼매나 놀랬는지 암미꺼.

  1224,31일 딱 두 번 통행금지가 풀린다

하루 맥주 판매 양이 57박스, 막거리는 15말을 팔았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팔았던 술병을 담아 밖에 박스를 내놓았더니

다다친구가 니 지금 이거 며칠 팔은 기고하고 물어서,,,

어제 저녁에 다 팔은 기다(판매한 거다) 라고 대답했더니

택도 아인소리 하지 마라. 우째서 이리 많은 양을 팔수 있노 했다.

한 개 알이키주까 24일 이브날 저녁 장사 하다가 전기가 팍 나갔는기라..

그때는 테이블이 없어 못 팔고 그랬는데 때 마침 정전이 되자 나가는 사람은 나가고

 불이 꺼지니까 좋다는 사람도 많았다.

갑자기 곳곳에서 쪽쪽쪽~ 소리가 났다. 바로 키스타임..,,

또 불이 들어 왔다.40개중에 10개 비었다. 손님 받고 또 내리고 올리고

내리고 올리고,,,산처럼 쌓아놓은 걸 보고 사람들마다 ,,,이야,,이야,,,,

오전10시 시작해서 저녁10시까지 24시간 풀로 장사했다.

  몇 살에 장사했슴미꺼,,,그 때가 36년 전 26살이었다.

  고 보면 제일 불행한거였다.그 돈이 남아 있으모 되는데 다 날라갔습니더.다른 사업도

많이 해봤지만 대부분 보증 서고 돈 빌려주고..,,

냉장고 하나만 사도 보증을 하던 시절이었다 아임미꺼

잘 나갔던 쪽샘.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10년 정도 핸 것 같습니다.

오래했지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