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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명가 학문당 서점을 찾아서..

 

1955, 창동63번지

 

현재 58년째 2대째 한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학문당 서점..

 

전화번호가 국번도 없는 숫자만 있는 빛바랜 흑백사진에서

시간을 거슬러 돌아본 옛 시절.

이 곳 주변은 학문당 서점만이 우뚝 서 있었다고 한다.

~ 그럼,,지난 무수한 세월의 흔적의 이야기를

권화현 사장님으로부터 들어보겠습니다.

 

22일 화요일 오후5~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니 책을 구매하는 모습도,

책을 보고 있는 고객의 모습도 볼 수가 없었다. 오직 고요함이 밀려왔다.

계산대 뒤 작은 사무실에는 언제나 변함없이 책상에 앉아 계시는 사장님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인사를 하고 들어서니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김경년주민기자 : 안녕하세요 사장님 ~

바쁘신데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를 한잔 건네 받으며, 자연스럽게 질문을 하였다.

 

먼저, 선친이 서점을 시작하게 된 시점은 언제였으며,

어떻게 서점과 인연이 닿았습니꺼?

 

권화현대표 : 선친의 고향은 산청 단계입니더

왜정시대 때는 교과서를 받을라카면 진주까지 60리길을 걸어서 나갔다고 합니더. 먼 길도 마다않고 진주까지 가서 서점에서 교과서를 받고 했는데

그것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고 좋았다고 하데예.

그리고 해방될 때 마산으로 내려와 첫 취직한 곳이 서점이었다고 함미더.

 

김경년 : 학문당 말고 그 전에 더 오래된 서점이 있었나보네예? ,

권화현 : 어르신이 계신 서점이 본영당? (뒤에 백영당임을 확인되었습니다.)

정확히 이름이 생각나지 않네예 , 첫 직장으로 서점에 취직을 했는데

그때부터 서점과 인연이 되었슴미더.

 

김경년 : 그러면 선친이 직접 창업을 한 시점은 언제임미꺼?.

 

권화현 : 학문당 간판 건 때는 1955년입니다.

<사무실내 걸려 있는 개업당시 오랜 흑백사진을 보면서 >

 

 

 

 

저 사진은 1960년대 초반입니다.

바로 옆 명신당은 그 당시 운동구점이었고

학문당이 최초로 3층 건물을 지었습니다.

 

우리어르신이 학문당 앞에서 저 뒤 골목까지 넓히는데 무려 30년이 걸렸습니더. 이곳이 원래 한양여관(박소선할머니)터 였슴미더.

앞에는 원래 명신당 땅이었고.10여평정도 되었는데

그 건물로 3층을 지어가지고 학문당이 제일 처음 지었죠.

주변이 모두 기와집, 양철집, 초가집이었슴미더..

바다가 훤히 다 보였고 이 좁은 길 앞으로 버스도 다녔습니더.

요즘처럼 큰 버스가 아니라 자그마한 버스였지예~~..

 

김경년 : 그러면 학문당 상호의 의미는 무엇이지예

권화현 : 우리어르신 호가 문당입니다.

 

김경년 : 사장님께서 언제가 말씀하시던 것을 잘 기억하여 창동예술촌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안내하면서 마산의 흔적 사진앞에 서면 꼭 선친이 학문당이라고 간판을 건 사연을 전합니다. 文堂이라는 호에 배울을 앞세워 학문당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맞지예? 사장님

 

권화현 : 맞습니다.

 

김경년 : 그라모 사장님은 어떻게 가업을 이어가게 됬슴미꺼?

 

권화현 :<웃으면서>공부를 못했으니까..자연스럽게 아버지 일을 물려받았지.

..고를 마산에서 나왔으니 얼마나 친구가 많겠슴미꺼.

하지만 친구들이랑 제대로 놀지도 못했어. 그 당시는 얼마나 쉴 틈없이

워낙 바빠서 나가지도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놀아가면서 하면 이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고 늘 강조했기에 친구들과 놀 수 도 없었다.

1년에 딱 두어번, 크리스마스 이브 날과 11일날..,

크리스마스 이브날 되면 통행금지가 없었다. 그날만큼은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나와라 하면 술집에서 생맥주 한잔하던 적은 있었다...

 

김경년: 여태 서점업을 하면서 가장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권화현 :나는 22살때부터 서점을 어른에게 물려받으면서 업무를 배웠는데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한 번씩 찾아왔다.

사연인즉 <학문당에서 책을 사서 공부를 해가지고 성공을 했다고,

책도 좀 훔쳤댜.. 정식으로 사과한다.

돈이 없어서 공부를 해야되기 때문에 어쩔수가 없었다>고 고백을 하며

방문한 적이 있다. 참으로 뭉클한 느낌이었지

 

사실, 그 당시는 가난해서 그런 경우가 많았다....

요즘아이들은 책을 못 사서 훔쳐가는 것이 아니고

손버릇이 나빠서 훔쳐가는 것이지.. 하하하

 

김경년 : 그럼 가장 힘든 점은 없었나요?

권화현 : 그런 것은 없었다.

 

김경년 : 가장 오래된 직원은 얼마나 되었나요?

권화현 : 강부장..30년입니다. ㅎㅎ 나이들어 갈 때가 없는거죠 뭐..

종사자가 10여명이 넘었죠. 지금은 8명이다.

 

김경년 : 이렇게 어려운데도 직원들이 거의 함께하고 있네예..

권화현 :그렇잖아도 늘 문을 닫아야 되나 해야되나 싶습니다

오프라인은 이제 안됩니다.

마산시내서점이 80년대 번성기때는 60~70개있었는데 지금은 6개 남았습니다.

신마산 세화당서점 자산동 동남서적, 학문당.

중리 회왕서점 , 합성동대신서점, 홈플러스내 가고파서점..,

 

2007년 문화문고 접었을 때, 학문당이라도 문화문고의 그 매상이 반이라도 따라와줘야하는데~ 없어요. 그 고객은 다 오데로 가삤슴미꺼..

인터넷으로 다 갔습니다. 이제는 별 의욕이 안남미더..

전체적으로 책 읽는거는 늘어났다고 하나 실제로 독자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더. 한계가 오죠~. 정말 한계가 왔습니다

문화문고를 서점을 접을 때 그래도, 학문당이 있기 때문에 접는게 쉬웠을겁니더.

이제 내 혼자밖에 없슴미더.

넘겨줄 때가 없습니다. 그나마 총판에 있는 사람들이 부도가 났는데

지금은 만세를 부른다 더 이상 못하겠다고.. 지난달에도 2개나 접었습니다.

마산시내 책을 공급해주는 도매상이 있지만,,,도매상도 문 닫는 실정이다.

판로가 없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은 뭔지 압미꺼?

성경책입미더,, 그런데 서점에서 성경책 하나 안 팔림미더

그게 다 오데서 팔리겠슴미꺼..

그리고 피아노 교본책은 또 얼마나 많이 팔렸겠슴미꺼.

그런데 이것 또한 피아노학원을 상대로 하는 업체로 나뉘어져버렸지요

그리고 신년이 되면 신수, 사주 보는 책..

없어서 못 팔았는데 이제는 팔리지도 않습미더......

 

아들보고 3대운영, .해라고 안한다. 이제 내 대에서 끝내야죠.

뭣이 좀 생기가 있고 살아나면...할 낀데 할 의욕이 없다.

얼마 전에 광장서점이라고 (서울대앞) 문 닫는 실정이다.. 안됨미더

 

모두가 문 닫고 할 때 그래도 마지막이라도 살아남아야지,

살아있어야지 하는 바램의 사람들은 정작 당사자인 본인은 생각지 않고

무언의 압력이 있죠., 있습니다.. 진작 문 닫아야되는데..

그리고 사람들이

니는 먹고 사는데 지장 없으니까 버티봐라

니가 채린 서점도 아니고 가업으로 물려 받은긴데 먹고 살만하다아이가

니 집인데 손해가면 얼마나 가겄노라고들 합니더

그런데 적자가 계속나는데 어떻게 계속 하겠슴미꺼 그라고,

출판사도 할 일이 아이고예 책을 공급해주니 자꾸만 부도가 나니까..

출판사도 서점에 책 공급을 안해줍니다.

그게 큰 애로사항입니다.

 

< 사장님의 이야기는 거침없이 계속 이어진다>

 

온라인, 오프라인이 함께 살아남으려면 도서 정가제를 해야한다.

우리나라 제대로 정가가 찍혀있는 것은 책밖에 없슴미더

그런데 이것을 온라인에서는 할인을 합니다.

 

출판사는 이 책을 만들면서 아~ 이 책은 온라인에 팔아먹어야지 하는 것은

10,000원 짜리를 15,000원으로 가격을 매깁니더

도서정가제를 하면예~ 출판사가 정당한 가격을 매길 수밖에 없슴미더

온라인도 자기들 마진 신간은 10% 구간은 몇% 30%~할인해주는 것은

전부다 출판사가 다 마진 챙기고 준 것이지,, 고객이 다 손해를 보고 있는겁니더. 오데 저거가 논 팔아가지고 싸게 해주는 것 아님미더

 

창원에 교보가 손님이 무지무지하이 많습미더. 근데,흑자가 안난담미더

왜냐? 종업원이 많은께, 집세가 비쌈미더

어지간히 팔아가지고는 흑자내기는 어렵습미더

 

되는 거는 되고 안 되는거는 안 됨미더

정가에 마진 따먹기 하는 장사가 뻔한건데

.........

인터뷰를 동행한 편집국장님께서도 한 말씀 하셨다.

김공양 : 저도 학문당에 대한 기억이 딱 하나있습니다.

중학교1학년 신학기 봄이었습니다. 국어선생님이 시조30개를 외워오라고

숙제를 내 주시어 다행히 집과 멀리 있지 않은 학문당에 왔습니다.

시조 책을 필요로 한다고 했더니 누군가는 모르겠지만

책꽂이 구석구석을 뒤져 찾아가지고 주시어 밤새 외워 국어시간에 발표를 하였다. 만약 시조집을 구해주지 않았다면 학문당과의 인연도, 국어선생님에 대한 총애도, 공부에 대한 집념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기억을 떠올려주셨다.

 

마산사람이라면 누구나 학문당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권화현 : 그리고 우스개 소리 같지만 실지로 우리 같이 오랫동안 가게를 한 사람은 시장에 내려가서 물건을 사려고 해도 조심스럽습니다.

왜냐고요? 이 집에서 물건을 사면 저 집에서

우리 아아들~ 학문당에서 책 다 사가지고 공부시켰다.

와 그 집만 가노?합미더.. 웃으며 모든 게 참 조심스럽습니다.

이집도 가야되고 저 집도 가야되고....

.......................................

창동 속 타임머신같은 이야기는 아마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창동사람들만의 번성했던 시절과 애잔함,,그리고 그리움이 숨어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랜 흑백필름의 기억들을 상기하면서,

창동주변의 지난 삶의 모습들을 잠시나마 되새겨봄을 감사히 생각하면서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끝으로 창원시의 보다 큰 관심과 비젼으로 창동이 보다 활성화가 되기를 바래는 사장님의 너털웃음으로 사진을 찍으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권화현 사장님,

언제나 파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