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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페이비 추천 이 사람이 궁금하다

 

상권 살리기에 나선 창동 잔다르크

김경년 마산창동통합상가상인회 간사

 

글 남석형 기자 nam@idomin.com/사진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지난 6월호에 페이스북 창원시그룹(www.facebook.com/groups/feibe) 추천으로

창원시청 온라인홍보담당 임성운 씨 얘기가 담겼다. 이참에 페이스북 창원시그룹 추천을 받아 인터뷰하는 고정 코너를 만들기로 했다. 일명 페이비가 추천한 사람-이 사람이 궁금하다’.

 지난 529일 페이스북 창원시그룹에 추천 부탁 글을 올리자 페이비들이 여럿을 추천해 주셨다.

 이 가운데 김경년 창동통합상가상인회 간사를 첫 번째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 추천된 다른 분들도 이 코너가 폐지되기 전까지 언젠가는 만나야 할 분들이다.

 

 

불교학생회로 기억되는 ‘10

 

김경년(50) 창동통합상가상인회 간사는 자신의 직책과 이름을 새긴 명찰을 목에 걸고서

 옛 시민극장 앞에서 사람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문득 해설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는 최근 오픈한 창동예술촌 쪽으로 안내한다. 걸음이 참 빠르다.

사실 창동예술촌 사무국은 따로 있지만, 찾는 사람들 안내하는 것도 스스로 나서 하고 있다.

초반 반응이 매우 좋아요. 사람 하나 없던 골목이 시끌벅적해지고, 사진 찍는 소리가 들려요.

이런 모습에 가슴이 뛰죠.”

창동예술촌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나서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 사람을 알 시간이다.

김 간사는 지금도 거주하고 있는 추산동에서 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했다.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아이들을 쫓아내기도 했다.

그래도 김 간사의 10대 시절 기억이 나쁘지 않은 것은 불교학생회덕택이다.

저의 10대를 바꾸게 한 것은 불교학생회에요. 6학년 때 포교당 앞 대자유치원에 가끔 놀러 갔는데,

 그때 불교학생회 오빠들이 절에 오라데요. 부처님 앞에 놓여있는 떡 먹는 재미로 갔죠.

 오빠·언니들이 많이 귀여워해 주었죠. 어떤 때는 절에서 먹고 자기도 했어요.

스님한테서는 붓글씨도 배웠고, 법당에 있는 풍금도 쳤죠. 풍금은 학교서 얘들 피아노 치는 거 보고서는 따라 한 건데 곧잘 했어요. 제가 눈썰미도 있고, 음악적 감각도 있고, 좀 못 하는 게 없어요.

 1 때는 아는 언니를 통해 책을 알게 됐어요. 문학적 감성이 10대 때 저를 감싸기도 했죠.”

 

고등학교는 마산여상(현 무학여고)으로 갔다. 그런데 학교 가는 게 반갑지 않았고 결석도 자주 했다. 당시 여상 다니는 학생들은 머리를 양 갈래로 묶었다. 밖에서 봐도 인문계·실업계라는 것이 구분되는 것이다. 그게 너무 싫어 학교에 정을 붙이지는 못했다.

그래도 노래는 곧잘 해 합창반 반장을 하기도 했다. 이때 성악에 대한 꿈을 키우기도 했지만, 아버지·어머니는 대학에 보낼 생각이 없었다.

 

 

돈 벌어야 했던 ‘20

대학에 가지 못한 김 간사의 20대는 돈을 벌어야 하는 시기였다.

오빠는 군대 가고 돈 버는 몫은 장녀인 김 간사 몫이었다. 럭키에서 판촉사원으로 일했다. 그런데 198523살 때 B형 간염에 걸렸다. 간염은 무리하면 수치가 올라가기에 일을 더 하기 어려웠다.

병원 신세를 지면서 일을 그만둬야 했다. 월급 20만 원 받던 때인데 약값이 한 달에 24만 원이나 나왔다. 감당하기 어려워 약을 끊었다. 야쿠르트 하나 먹으며 데려가려면 데려가라는 마음이었다. 다행히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집에서는 돈 벌어 오라는 성화가 이어졌다. 이때 김 간사는 탈출구를 찾는다. 결혼이다.

자꾸 돈 벌어 오라길래 19862월에 가출해 버렸어요. 그리고는 직장 다니면서 알게 된 지금 아저씨랑 그해 4월에 결혼식 올리고 살았죠. 신혼여행도 못 가고 보증금 50만 원·월세 4만 원으로 시작했어요. 금성사 판촉물로 나온 숟가락 이런 거로 살림 꾸리고 그렇게 살았죠. 지금은 빚도 없고, 집도 두 채나 있으니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바깥세상에 눈 뜬 ‘30

김 간사는 상인회 일 말고도 현재 마산YMCA 이사를 맡아 청소년사업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사회활동에 눈을 뜬 건 199634살 때인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 주부 모임에서다.

부모 교육을 받으며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 지에서부터 시작해 소비자운동 및 상담 등으로 활동을 넓혔다. 조금 자신감이 붙자 살던 아파트에 찾아가는 음악회를 만들기도 하고, 꽃길 만들기·놀이터 위험도 조사 등 동네 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마산YMCA와 인연이 닿아 지금까지 이를 통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다양한 교육프로그램, 그리고 사람을 만나면서 마음의 눈이 넓어졌죠. 그냥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조금만 관심 두면 지역사회가 변할 수 있다는 걸 알았죠. 전화 한 통화만 해도 바뀔 수 있는 게 많아요. 이제는 습관화되어서 지나가다가도 눈에 걸리는 게 있으면 그냥 못 지나치죠.”

경남도민일보 홈페이지에서 김경년으로 검색해보면 음악수행평가, 꼭 사인받아야 되나요?’ ‘

합포만을 또 매립한다고요?’ 등 수많은 독자투고 글이 쏟아진다.

 

 

 

창동에 빠지게 된 ‘40

30대 후반, 창동에서 가방집 하던 여동생이 시집을 가면서 가게를 대신 맡게 됐다.

그러던 중 2007년 상인회가 창립되는데 사무실 전화받는 일 정도만 해달라

상인회 요청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하지만 뭐든지 하려고 하는 김 간사 성격에 전화만 받고 있을 리 없었다.

간사 일 맡고 뭐부터 할까라는 생각부터 했죠. 시장경영진흥센터 상권개발팀에 전화해서 창동상권 진단부터 부탁했죠. 그걸 시작으로 200712월 메가라인 극장이 문을 닫자 모두가 창동 상권 다 죽을 거라고 했죠. 그때는 황철곤 마산시장님한테 편지도 많이 쓰고 했죠.”

블로그를 통해서는 경남은행장에게 편지를 띄우기도 했다. 경남은행 예전 본점이었던 부림지점 창동 상인들 통해 성장했으니, 지역사회에 공헌도 좀 하라는 것이 요지였다. 이를 통해 일정 부분 성과를 얻기도 했다.

극장이 사라진 곳에 소극장이 들어서도록 했고, 청소년 문화존을 만드는데도 땀을 흘렸다. 이런 속에서 상인들에 대한 아쉬움도 크다.

나는 4대 보험도 없는 일용직이에요. 그런데도 길에 나가서 창동 온 사람들에게 설명도 하고 안내도 하고 그러죠. 그런데 우리 내부의 신뢰는 너무 없는 것 같아요. 창동에서 장사하면서도 찾는 사람들에게 이곳 좋은 점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아요. 300점포가 스스로 홍보하면서 내부 고객만 잘 잡아도 괜찮아 질 텐데. 에휴, 힘들어요. 하루 열두 번도 더 그만둔다소리를 하죠.”

김 간사 기억에 창동이 그래도 2002년 정도까지는 주말에 사람이 어느 정도 있었다.

“2003~2004년 되면서 찾는 사람이 확연하게 줄어들었어요. 대형멀티플렉스가 들어오면서 연흥극장 같은 오래된 극장이 다 사라지고,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여기 있던 브랜드들이 다 빠져나갔죠. 강남극장 건물이 무너질 땐 정말 슬펐어요.”

이 때문에 여전히 극장을 접목하는 것에 대한 미련을 두고 있다. 과거 창동에는 영화 보러 나온 이들이 많았기에 여기에서 힌트를 얻으려 하는 것이다. 옛 시민극장 건물을 사들여 대한민국 영화 박물관같은 것을 만들고 싶은 것은 아직은 바람이다. 찾는 이들이 쉬고 머물 수 있는 녹지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또 다른 바람이다. 이는 행정의 힘이 필요한 부분이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

20074월 간사를 맡고 나서 지금까지 딱 3일을 쉬었다. 요즘도 눈 뜨면 어느새 창동에 와 있다. 그래도 수요일에는 기타도 치고, 셋째 주 일요일에는 걷는 사람들활동을 한다.

페이스북·블로그 활동도 그의 삶에 활력이 되고 있다. 페이스북 창원시그룹 오프라인 모임에는 과거보다는 자주 얼굴을 내밀지 못한다. 물론 창동에서 모임이 잡히면 언제든지 뛰어나갈 마음이다. 블로그는 개인 이야기가 아닌 역시 창동 얘기를 담고 있다. 점포 소개도 하고, 사람 소개도 하는 공간이다. 여러 글 가운데 사라져간 영화관 이야기는 많은 이로부터 공감을 얻기도 했다.

이렇게 바쁜 김 간사라지만 바깥 일 때문에 집안을 흐트러지게 하는 법도 없다.

엘지전자 다니는 남편은 저녁에 9시나 돼야 들어오고, 뭐 사사건건 참견하는 사람도 아니에요. 얘들도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시간이 있기에 다들 이해하죠. 제가 하는 일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거죠. 바깥 일 할 땐 하더라도 밥 제때 안 차려준 적 없고, 제가 또 요리 솜씨도 뛰어나거든요.”

엄마가 이루지 못한 예술의 길은 23살 딸이 걷고 있다.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다. 김 간사는 스스로 음감이 발달했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피아노·기타·하모니카·아코디언··장구 등 소리 나는 건 다룰 줄 안다. 그냥 소리를 듣고 따라 치다 보니 저절로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제일 잘하는 건 젓가락 반주란다. 어릴 적 아버지의 그 소리를 밤새 들었기에.

김경년 간사는 다시 창동 주제로 돌아와 얘길 마무리하려 한다.

창동은 제 삶의 에너지예요. 들어서는 순간 지나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안녕하세요라는 말이 튀어나와요. 지금 절에 가도 창동 잘되게 해달라고 빌어요. 나중에 창동에 관한 책을 쓰고 싶어요. 이곳 골목·풍경들, 그리고 제가 활성화를 위해 처음 가졌던 마음, 그러한 과정들 말이죠. 창동아지매로 기억되고 싶어요. 몇 년 후 창동에 어느 미친 여자가 해설사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거에요. 멋있지 않나요?”

이날 첫 만남에서 보는 이가 해설사라는 단어를 떠올렸으니, 김경년 간사는 이미 미래에 아주 가까이 가 있는 듯하다.

Posted by 창동아지매(골목해설사) 김경년

 

 

 

Public/ 페이비 추천 이 사람이 궁금하다

 

상권 살리기에 나선 창동 잔다르크

김경년 마산창동통합상가상인회 간사

 

글 남석형 기자 nam@idomin.com/사진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지난 6월호에 페이스북 창원시그룹(www.facebook.com/groups/feibe)

추천으로 창원시청 온라인홍보담당 임성운 씨 얘기가 담겼다.

이참에 페이스북 창원시그룹 추천을 받아 인터뷰하는 고정 코너를 만들기로 했다. 일명 페이비가 추천한 사람-이 사람이 궁금하다’.

지난 529일 페이스북 창원시그룹에 추천 부탁 글을 올리자

페이비들이 여럿을 추천해 주셨다. 이 가운데 김경년 창동통합상가상인회 간사를 첫 번째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추천된 다른 분들도 이 코너가 폐지되기 전까지 언젠가는 만나야 할 분들이다.

 

 

불교학생회로 기억되는 ‘10

김경년(50) 창동통합상가상인회 간사는 자신의 직책과 이름을 새긴 명찰을 목에 걸고서 옛 시민극장 앞에서 사람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문득 해설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는 최근 오픈한 창동예술촌 쪽으로 안내한다. 걸음이 참 빠르다.

사실 창동예술촌 사무국은 따로 있지만, 찾는 사람들 안내하는 것도 스스로 나서 하고 있다.

초반 반응이 매우 좋아요. 사람 하나 없던 골목이 시끌벅적해지고,

사진 찍는 소리가 들려요. 이런 모습에 가슴이 뛰죠.”

창동예술촌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나서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 사람을 알 시간이다.

 

김 간사는 지금도 거주하고 있는 추산동에서 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했다.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늘 쫓아내기도 했다.

그래도 김 간사의 10대 시절 기억이 나쁘지 않은 것은 마산불교학생회덕택이다.

저의 10대를 바꾸게 한 것은 불교학생회에요.

6학년 때 포교당 앞 대자유치원에 가끔 놀러 갔는데, 그때 불교학생회 오빠들이 절에 오라데요. 부처님 앞에 놓여있는 떡 먹는 재미로 갔죠.

오빠·언니들이 많이 귀여워해 주었죠. 어떤 때는 절에서 먹고 자기도 했어요. 스님한테서는 붓글씨도 배웠고, 법당에 있는 풍금도 쳤죠.

풍금은 학교서 부잣집 얘들 피아노 치는 거 보고서는 따라 한 건데 곧잘 했어요. 제가 눈썰미도 있고, 음악적 감각도 있고, 좀 못 하는 게 없어요.

1 때는 아는 언니를 통해 책을 알게 됐어요.

문학적 감성이 10대 때 저를 감싸기도 했죠.”

고등학교는 마산여상(현 무학여고)으로 갔다. 그런데 학교 가는 게 반갑지 않았고 결석도 자주 했다. 당시 여상 다니는 학생들은 머리를 양 갈래로 묶었다. 밖에서 봐도 인문계·실업계라는 것이 구분되는 것이다.

그게 너무 싫어 학교에 정을 붙이지는 못했다.

그래도 노래는 곧잘 해 합창반 반장을 하기도 했다. 이때 성악에 대한 꿈을 키우기도 했지만, 아버지·어머니는 대학에 보낼 생각이 없었다.

 

 

돈 벌어야 했던 ‘20

대학에 가지 못한 김 간사의 20대는 돈을 벌어야 하는 시기였다.

오빠는 군대 가고 돈 버는 몫은 장녀인 김 간사 몫이었다.

()럭키에서 판촉사원으로 일했다. 그런데 198523살 때 B형 간염에 걸렸다. 간염은 무리하면 수치가 올라가기에 일을 더 하기 어려웠다.

병원 신세를 지면서 일을 그만둬야 했다. 월급 20만 원 받던 때인데 약값이 한 달에 24만 원이나 나왔다. 감당하기 어려워 약을 끊었다. 야쿠르트 하나 먹으며 하늘이 날 데려가려면 데려가라는 마음이었다.

다행히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집에서는 돈 벌어 오라는 성화가 이어졌다.

이때 김 간사는 집을 나와 탈출구를 찾는다.

자꾸 돈 벌어 오라길래 19862월에 가출해 버렸어요. 그리고는 직장 다니면서 알게 된 지금 아저씨랑 그해 4월에 결혼식 올리고 살았죠.

신혼여행도 못 가고 보증금 50만원·월세 4만원으로 시작했어요. 남편의

금성사 판촉물로 나온 숟가락,이불, 그릇등 이런 거로 살림 꾸리고 그렇게 살았죠. 지금은 빚 하나 없고, 집도 두 채나 장만했으니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바깥세상에 눈 뜬 ‘30

김 간사는 상인회 일 말고도 현재 마산YMCA 이사를 맡아 청소년사업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사회활동에 눈을 뜬 건 199634살 때인 아들이 다니는 YMCA아기스포츠든 주부 모임에서다. 부모 교육을 받으며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먹거리, 소비자운동 및 상담 등으로 활동을 넓혔다. 조금 자신감이 붙자 살던 두산아파트에 마산시 최초로 찾아가는 음악회를 만들기도 하고, 꽃길 만들기·놀이터 위험도 조사,아파트대학 등 동네 생활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마산YMCA와 인연이

닿아 지금까지 이를 통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다양한 교육프로그램, 그리고 사람을 만나면서 마음의 눈이 넓어졌죠.

그냥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조금만 관심 두면 지역사회가 변할 수 있다는 걸 알았죠. 전화 한 통화만 해도 바뀔 수 있는 게 많아요. 이제는 습관화되어서 지나가다가도 눈에 걸리는 게 있으면 그냥 못 지나치죠.”

경남도민일보 홈페이지에서 김경년으로 검색해보면 음악수행평가, 꼭 사인받아야 되나요?’ ‘합포만을 또 매립한다고요?’ 등 수많은 독자투고 글이 쏟아진다.

 

 

창동에 빠지게 된 ‘40

30대 후반, 창동에서 가방집 하던 여동생이 시집을 가면서 가게를 대신 맡게 됐다. 그러던 중 200612월에 상인회가 창립되는데 저는 20074사무실 전화받는 일 정도만 해달라는 상인회 요청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하지만 뭐든지 하려고 하는 김 간사 성격에 전화만 받고 있을 리 없었다.

간사 일을 맡으면서 뭐부터 할까라는 생각부터 했죠.

시장경영진흥센터 상권개발팀에 전화해서 창동상권 진단부터 부탁했죠.

그것을 시작으로 주말마다,그리고 상궐활성화를 위한 여러자료등을 검토하고 방안을 찾기 시작했답니다. 200712월 메가라인 극장이 문을 닫자 모두가 창동 상권 다 죽을 거라고 했죠. 그때는 중소기업청장, 황철곤 마산시장님한테 편지도 많이 쓰고 했죠.”

경남은행장에게 직접 편지를 띄우기도 했다. 그당시 경남은행 예전 본점이었던 부림지점이 창동 상인들을 통해 성장했으니, 지역사회에 공헌도 좀 하라는 것이 요지였다. 이를 통해 셔트만 내려져있고 흉물처럼 방치되어있던 은행을 외벽도색과 함께 365지급기를 설치하며 성과를 얻기도 했다.

 

극장이 사라진 곳에 창동예술소극장이 들어서도록 했고,

마산YMVCA와 함께 청소년 문화존을 유치, 진행하는데도 많은 땀을 흘렸다. 이런 속에서 상인들에 대한 아쉬움도 크다.

 

나는 4대 보험도 없는 일용직이에요. 그런데도 길에 나가서 창동 온 사람들에게 설명도 하고 안내도 하고 그러죠. 그런데 우리 내부의 신뢰는 너무 없는 것 같아요. 창동에서 장사하면서도 찾는 사람들에게 이곳 좋은 점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아요. 300점포가 스스로 홍보하면서 내부 고객만 잘 잡아도 괜찮아 질 텐데. 에휴, 힘들어요. 하루 열두 번도 더 그만 둔다소리를 하죠.”

김 간사 기억에 창동이 그래도 2002년 정도까지는 주말에 사람이 어느 정도 있었다.

“2003~2004년 되면서 찾는 사람이 확연하게 줄어들었어요. 대형멀티플렉스가 들어오면서 연흥극장 같은 오래된 극장이 다 사라지고,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여기 있던 브랜드들이 다 빠져나갔죠. 강남극장 건물이 무너질 땐 정말 슬펐어요.”

이 때문에 여전히 극장을 접목하는 것에 대한 미련을 두고 있다. 과거 창동에는 영화 보러 나온 이들이 많았기에 여기에서 힌트를 얻으려 하는 것이다. 옛 시민극장 건물을 사들여 대한민국 영화 박물관같은 것을 만들고 싶은 것은 아직은 바람이다. 찾는 이들이 쉬고 머물 수 있는 녹지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또 다른 바람이다. 이는 행정의 힘이 필요한 부분이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

20074월 간사를 맡고 나서 지금까지 딱 3일을 쉬었다.

요즘도 눈 뜨면 어느새 창동에 와 있다. 그래도 수요일에는 기타도 치고, 셋째 주 일요일에는 걷는 사람들활동을 한다.

페이스북·블로그 활동도 그의 삶에 활력이 되고 있다.

페이스북 창원시그룹 오프라인 모임에는 과거보다는 자주 얼굴을 내밀지 못한다. 물론 창동에서 모임이 잡히면 언제든지 뛰어나갈 마음이다. 블로그는 개인 이야기가 아닌 역시 창동 얘기를 담고 있다. 점포 소개도 하고, 사람 소개도 하는 공간이다. 여러 글 가운데 사라져간 영화관 이야기는 많은 이로부터 공감을 얻기도 했다.

이렇게 바쁜 김 간사라지만 바깥 일 때문에 집안을 흐트러지게 하는 법도 없다.

엘지전자 다니는 남편은 저녁에 9시나 돼야 들어오고, 뭐 사사건건 참견하는 사람도 아니에요. 얘들도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저의 다양한 활동과 시간이 있기에 다들 이해하죠. 제가 하는 일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거죠.

바깥 일 할 땐 하더라도 밥 제때 안 차려준 적 없고,

제가 또 요리 솜씨도 뛰어나거든요.”

엄마가 이루지 못한 예술의 길은 23살 딸이 걷고 있다.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다. 김 간사는 스스로 음감이 발달했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피아노·기타·하모니카·아코디언··장구 등 소리 나는 건 다룰 줄 안다. 그냥 소리를 듣고 따라 치다 보니 저절로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제일 잘하는 건 젓가락 반주란다. 어릴 적 아버지의 그 소리를 밤새 들었기에.

김경년 간사는 다시 창동 주제로 돌아와 얘길 마무리하려 한다.

 

창동은 제 삶의 에너지예요. 들어서는 순간 지나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안녕하세요라는 말이 튀어나와요. 언젠가 나의 인생후기에 창동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책으로 쓰고 싶어요. 이곳 골목·풍경들, 그리고 제가 활성화를 위해 처음 가졌던 마음, 그러한 과정들 말이죠.

그리고 지역사람들에게 창동아지매로 기억되고 싶어요.

60대에는 지난날 창동에 어느 미친 여자가 창동골목을 누비며골목해설사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거에요. 멋있지 않나요?”

 

이날 첫 만남에서 보는 이가 해설사라는 단어를 떠올렸으니,

김경년 간사는 이미 미래에 아주 가까이 가 있는 듯하다.

 

 

Posted by 창동아지매(골목해설사) 김경년

 

 

지난 11일 금요일 이른저녁시간..

창동가배소극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삐그덕거리는 계단을 밟고 들어섰다.

지역의 많은지인들이 인사를 나누며..소극장 가득 자리를 메워주었다.

 

여태,,,, 행사에 참석한 손님에게 캔맥주를 선뜻 준비해놓은 일은 ㅋ 이례적이었다.

편안하게 캔맥 하나쯤 마시면서 필자와 독자의 만남을 주선해주는 것같아

퍽이나 분위기가 화기애애하였다.

 

6시30분...

출판사에서 저자의 이야기와  관객에게 질문을 묻고 답하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김주완편집국장님의 기자가 된 이유  ,  지역신문이 해야할일,

이왕 하는것 재미있게 해야하는 생각들을 피력하였다.

 

' '   .....누구나 자긍심을 갖지 않으면 그 일을 할 수가 없다.

자부심을 가져야 애정을 가질수 있고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의 모토는' 즐겁게 살자 '이다.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모순등을 찾아내고.. 그에대한 해결책을 ..'..

'1992년3월에 마산에 왔다.마창노련, 마창연합등..소위 운동단체 사무실에 가보니까 지역신문을 하나도 보고 있지 않았다. 한겨레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왜 지역신문을 보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지역에 신문같은 신문이 있느냐 고 말하였다.

그라모 어떤것이 신문같은 신문이냐

한겨레같은 진보를 싣는게 신문이지..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일은 아무 관심없고 오직 서울에만...

이래서 무슨운동을 하겠느냐...언쟁을 하였다...

우리지역에 내주변에 사람들이 지금까지 살아왔고 현재살고 있는 삶의 모습속에서 우리사회가 안고있는모순과 문제를 찾아야한다. 형식적으로 구조적으로.. 사회과학적인 논쟁은 백날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질문: 직장동료나 직장상사로 볼 때 까다롭고 요구하는것들.. 불편한을 겪는일은 없느냐

이승환기자 :예상하신그대로구요... 일단 책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두..웃음)

기자로 살아남기를 바꾸어본다면 SNS시대에 지역신문기자로 살아남는 부를 위해 착취.. 모두 웃음...

한 분 즐겁게 살기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지..

하지만 분명히 함께해야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열씸히들,,,

 

질문: 이 책의 집필중심을 보면 지역신문의 성공모델을 모색하고 있다... ???

신문시장이 어렵다.. 사향산업이다. 뉴미디어는 아니다. 올드미디어중에서도

가장 오랜된 미디어다.. 언제가는 신문이 사라질 것이다.

우리신문사에서 생산해내는 상품이 뭐냐고 물어본다..

보통은 뉴스를 생산해낸다고 한다.. 담아서 전달하는 그릇, 수단이다.

뉴스의 가치는 미래사회를 갈수록 높아질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미리 대비해야한다.

종이신문에만 집착하지 말고 새로운 뉴스전달수단에 미리 대비하면서 준비를 하면은

지역신문의 미래가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다.

 

질문: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보면 지역신문이 살아남기 위한 대안을 크게 2가지로 제시한다면?  ,,,,

 

공공저녈리즘.. 지역밀착에 대하여 구연설명을 바란다.

 

신문이 존재하는 이유가 뭘까요신문이 우리사회에서 필요하는 것은

내가사는 세상, 내가사는 지역이 좀더 인간적이고 좀더 살기좋은 세상으로 바꾸기 위한 그래서 신문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특히 지역신문은 우리지역이 좀더 살기좋게 발전하기위해 기여해야한다.

 

난 중앙지라고 말하지 않는다.

서울지라고 표현한다.. 서울지들이 해오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고 모방만 하면

고유신문의 기능이라고 할 수 없다.

단순한 보도 전달에만 그치지 말고 좀더 즐겁게 지역사회와 결합하고

지역의 시민들과 함께 시역사회를 바꿀수 있는 여러 방법들을 개발해야한다.

신문사가 종이신문에 뉴스만 담아 지역시민단체역할까지도 해야한다.

지역의 현안들을  시민들과 함께 토론회도 하고 방향도 정하고 서명운동, 시위까지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지역사회 공감하는 의제를 함께 수행해가는 것이다.

그런 것이 바로 공공저널리즘이라고 생각한다.

예> 

인물시도, 26살 혜영씨의 죽음이야기 (퇴근길,, 자기차를 몰고가다 전봇대를 들이박아 죽음)

우리나라,, 재해로 인정되지않는다.. 입사한지 10일만에 한달월급도 못받고..

장례,위로금하나  못받았다. 26년의 짧은 삶을 스토리텔링으로 가슴아픈이야기를 신문으로 썼다. 너무나 뜨거웠다.. 울었다는 독자... 그내용을 블로거에 올렸더니 그 한편의 글에

 68만명이상의  조회가 있었다.

그 기사를 스트레이트 기사로만 보도했다면....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것이다..

 

흑자가 났다.   그라모 이제 주주들에게 배당금좀 주나요? ㅎㅎ

하지만 배당금은 나눠주질 못했다.. 빚이 많기 때문에.....

................이하생략

 

객석과 무대의 대화는 현재 경남도민일보가 구상하며 가고 있는 사업, 지역,

사람중심의 코너등 현재 독자가 보는 관점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어떻게 함께 독자참여를 이끌어낼것인가등 질문과 응답으로 끊이질 않았다,,

허리를 받쳐주는 의자가 아닌 탓에 계속적으로 앉아있는 것도 무리였다..

더 이상의 궁금점은 뒷풀이에서 하는 걸로

마무리를 짓고 미리 예약해놓은 쪽샘골목 막걸리집으로 이동을 하였다. 

 

이 모든 시간의 풍경들이 지역사람들이 있기때문이다.

지역을 풍요롭게 하는 따뜻함이 있는 사람들이 있기때문이다.

김주완편집국장님의 지치지 않는 지역사랑, 지역사람과 함께 하기 위한 아이디어에

다시한번 더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Posted by 창동아지매(골목해설사) 김경년

지난12월 22일 토요일 저녁6시..

마산 창동 가배소극장에서 '동네방네 이야기쇼'가 마련되었습니다.

경남도민일보와 극단마산이 주최하고

경남도민일보 이승환기자와 김민지기자가 사회를 보았던 자리입니다.

이야기 손님으로는 나와 남치성 창동예술촌 입주 작가님이 함께 초대되었습니다.


역시나 SNS페북의 친구들이 아름아름 자리를 메워주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이들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1부시간에 준비된 것은 시사이야기 깔짝시간으로

최근 대선을 끝낸 후 각각 느꼈던 소감 한마디씩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객석으로 각각 마이크를 돌리면서

1번을 찍었던 사람, 2번을 찍었던 사람들,

20대와 50대의 저마다, 아주 짧게, 혹은 긴 이야기들이 먹먹하게 전해졌습니다.

모두는 우리사회와 정치를 걱정하고 기대가 컸음을

다시 한번 느낄수 있었습니다.

 

2부시간에 앞서,

별이빛나는밤에(예술촌22번입주자) 대표의 이상훈님으로부터

오후에 긴급 부탁한 문자메세지를 받고 기타하나메고 달려왔습니다.

무슨자리인지, 뭘하는 사람들이 모였는지 전혀모르고..

그래도 냉큼 저의부름에 달려와서는

"바위처럼,"을 불러주었고 앵콜로

김광석의 노래를 한곡 더 불러주어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본격적으로  저와 남치성작가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창동과 인연을 맺은 이야기부터 창동예술촌의 시작과

과정, 현재의 모습에 대하여 끊임없는 객석의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창동예술촌을 다녀간 시민들의 하소연(불만)을 들으며

그에 변명아닌 진심어린 절절한 답을 하느라 혼쭐이 났습니다.



5월25일 개막된 창동예술촌.

그 이름은 너무나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저에게 크나큰 설레임을 주었으나,,

땅을 파고 점포를 뜯어내고

전봇대를 뽑아내고 간판을 뜯어내고 먼지와 소음속에서

상인들과의 볼멘소리는 끊임없이 높아져 매일매일 민원이 쏟아졌던...

그리고도,,

몹시도 힘들고 부족함이 많은 조건에서 매우 시작이 미약했습니다.

화장실, 쉼터, 표시물하나 없는 이 곳,,

작품전시장 하나 번듯하게 없는 이 곳,

그렇게 무더운날 에어콘이 없이 힘든 공간,

비가오면 물이 새던 공간,

그렇지만 아주 작은 3,1평에서 부터 100평까지 곳곳에 입주를 계약하고

어떤 컨셉을 부응하겠다고 시작한 입주자들..

지금은. 그뜻에, 그 역할에 부응하지 못하고 불이꺼져있고

늘 문이 닫혀있는 모습들을 보면 정말 속이 상하기만 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변명 아닌 현실적 어려움을 이야기만 늘어놓게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과정이든 언제나 어려운 문턱이 있습니다..

이제 8개월이 접어들었습니다.

출발부터 석연찮고 부족했던 구조적어려움이 있었지만

바깥에서 던지는 목소리, 시선을 접어두고

새로운 모습으로 시작하기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는 창동예술촌 입주작가들이

마음을 모았습니다.

앞으로 많은 관심과 애정으로 지켜봐주시기를 염원하며,,

개인적으로

창동의 2020프로젝트를 꿈꾸고 있는 저의 작은 희망도 말해보았습니다.

분명코 문화예술 역사가 숨쉬는 창동, 골목여행이 많은 사람들에게

즐겨찾는 곳으로 변화될것을 그리면서

마지막으로 제가 준비한 노래를 한곡 들려드렸습니다.

 

이렇던 저렇던

어떤 모임이든, 어떤 사람이든, 어떤 단체들이든

창동속에서 함께 웃고 즐기고 모이는 일들이

많아지리라 희망합니다.

참..진행측에서 전혀 생각치도 못한,,

아름다운 가게되살림터를 책임지고 있는 최명간사님이 행사후

남은 에코가방과 선물을 가져와서 객석 손님에게

나누어주는 훈훈한 모습도 무척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많은 사람들과 창동이야기를 ,창동에 바라는 마음들을

함께 나누었던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Posted by 창동아지매(골목해설사) 김경년
후다닥 창동한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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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8일 화요일 이은진 교수님 퇴임강연 - 사회학적 실천연습

마산생활이 시작된 시절, 사소한 생활이야기 기록을 되돌아보면서 퇴임강연을 하신 이은진 교수님, 퇴임 강연을 준비하기위해 지난 시간의 자료들을 하나씩 들추어 챙긴모습 이 역력한 시간이었다. 나도 그날 그시간이 그냥 재미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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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정비
골목 정비 2017.12.15

와 그쪽만 해줍니꺼,,,우리골목도 좀 해주이소~ 어둡고 노후횐 골목 바닥정비 합니다.. 중성동 족발골목, 그리고 만미정 골목 .창원시,창원시도시재생지원센터. 도시재생 선도사업예산

후다닥 창동한바퀴~
후다닥 창동한바퀴~
후다닥 창동한바퀴~
후다닥 창동한바퀴~
후다닥 창동한바퀴~
아~~ 옛모습이 이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