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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창동의 역사를 한눈에

▲왼쪽 연기나는 공장이 마산방직> 교롱요양소, 창원군 월포국민교, 제일여고, 삼풍발효,

보수식품, 전매지청,00철공소, 방송국, 월영국민교, 상공회의소,마산경찰서, 우체국,

불노식품, 마산극장, 조선운수, 마산역(신마산역) 보건사무소, 조해주조,칠성주조장,소방서,해인대학, 마산여자고등교, 마산여중고,성지여고,천주교회, 마산고등학교, 마산중학교,

완월국민교,창원세무청, 전매청, 법원검찰, 도립병원  남전, 중앙주조,  마산 무학주정, 마산세관,  미곡창고(바닷가 뾰족한 곳), 무학국민교, 몽고장유,대양방직, 환금장유, 시외주차장,

삼일주조장, 대흥주조장00공업,, 의창수산,청과회사, 강남극장, 중앙교회,시민극장,

중앙중학교,성호국민교, 문창교회,흥안공업사ㅡ의신여중, 마포중학교, 북마산역, 회원국민교, 동중학교, 창신농고, 창동택시,상은, 저은,농은, 홍은,(상업은행, 저축은행, 농협은행, 은행인것 같은,,,,)형무소, 태극운수, 고려모직,  구마산역, 상업고등교,합포국민교, 대명모직,

신흥방직, 공업고등학교, 신한모직가공,

1950년 창동의 거리,,,금방, 양복, 다방천국이었다.

황금당은 현재위치 그대로다. 거리에 사람들이 무척많다.

한성다방도 보이고' 양복은 이화' (꽤유명했나보다..)오른쪽 평화당은2009년에 문을접었다. 

▲1950년대 시민극장의 모습... 옆 시민전자는 현재LG25시편의점

신신라사, 세신양복점, 국화라사점, 제일양복점, 형제양복점,  마산극장,  제일극장, 대한노총마산지구 근로조합연합회 , 은하사이다

매일주유소, 세화유리상회, 중앙유리상회, 대성모직주식회사,  태창요리상사,

   마산건축사무소, 일신백화점, 무학운동구점

 

오른쪽 아래 오행당약국간판이 보인다.(창동의 마지막극장 창동공화국 메가라인)

그시절 유명했었던 에스콰이아 구두가게도 보인다.....사람들이 많이오고가는 모습이다.

1900년대일것 같다...(비자비, 명곡사,세탁 . 머피노래방은 아직도 영업중)

  <유장근교수의 마산지역사강의 에서>

                             창동을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저녁시간...

▲1960년 학문당 개업당시의 모습

    ▲60년대일것 같다..

조일당. 창동 120-2번지.

예나 지금이나 사랑하는 남녀사이의 애정을 과시하는 최상의 상징물은

아마도 반지가 최고일 것이다.
서로가 만난 기념일을 맞이하여 주고받는 커플링반지, 미래의 삶을 약속하며 주고받는 약혼 반지, 결혼 반지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 장신구들의 화려한 디자인에 언제나 연인들은 매료된다.

눈부시게 빛나는 조명아래 올망졸망 꾸며진 보석 진열대 앞에는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기도 한다. 창동사거리에서 1974년부터 시작해

 2대 째 귀금속집을 운영하고 있는 조일당. 2011년에 창원city7으로 옮겼다.

옛날엔 창동 조일당 앞으로 버스가 지나 다녔다고 한다.

 특히 가게 앞이 정류장이어서 사람들이 쉽게 오갔던 곳이라고.

▲ 창원으로 사업장을 옮기기 전 조일당 전경

마산 경제활동의 중심을 이루었던 수출자유지역, 한일합섬에는 일하는 여성들이

 무척 많았던지라 주로 구매고객의 중심을 이루어 주었고,

 명절에는 하루에 시계를 267개를 판매하는 기록도 남겼다고 한다.

밀수 보따리 장수로부터 시계를 공급 받기도 하여 세관에도 여러 번 오가며 조사 받으러

다녔던, 웃지 못할 다양한 옛 이야기들을 풀어내 주셨다.

한때 '시계는 조일당, 금은 황금당'이라고 부를 만큼 장사가 정말 잘 됐다고 한다.

 

조사장님 말씀을 들어보니

국산시계가 처음으로 판매된 게 1975년~76년 라미시계였다고 한다.

70년대는 혼수예물 반지로는 '스타 반지'가 최고 인기였으며,

몇 년 후에는 진주 알반지가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최고의 예물시계는 30만원을 호가하던 로렉스였다고.

 당시 로렉스는 언감생신 꿈도 못꾸던 서민들은 예물시계로 3~5만원 하던 라도(스위스)를 가장 선호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라도 시계를 해줄 수 없으면 파혼을 당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손님이 왕래를 하였는지 접대용으로 다방에서 차를 배달시키곤 했었는데 하루 찻값만 하여도 1만 4,000원이었다고 한다. 한끼 식대가 99원할 때였으니 엄청난 찻값이 들어도 괜찮을 만큼 믿기지 않은 매출을 올렸다고 한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해 가는 소비자의 선택의 요구만큼이나 귀금속들의 변화 또한 다양해져가고 있다. 값싸고 만족스런 디자인들도 끊임없이 쏟아져서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으며

현재는 쥬얼리의 각종브랜드가 귀금속시장을 거의 점유하고 있는 현실이다.

 

 

 

 

 

황금당이야기>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귀금속 집 자체가 귀금속 만큼이나 귀한 집이었다.

 왜냐하면 일제 강점기라는 엄혹한 시절과 귀금속이라는 희소성이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불운한 상황 속에서도, 1938년 조선인 (故)박태용씨는 마산의 창동에 귀금속집 '황금당'의 씨앗을 역사 속에 심었다.

▲ 지금의 황금당 전경

그런 창업 당시의 풍경은 앞에서 말한 귀금속점의 희소성을 입증 하듯이,

‘황금당’은 마산 변두리 사람들까지 끌어 모아, 언제나 사람들이 넘쳐났다 한다.

어느 정도였냐면, 아침 개장 전부터 혼수와 패물을 맞추기 위해 모여든 손님들이 주인 기다리기를 예사로 했고, 개장을 하자마자 순식간에 20명 여명의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그 중 반이 양가 친척들로 구성된 이른바 '참관단'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당시만 하더라도 귀금속을 맞춘다는 것은 정말 큰일이었기 때문이었다.

▲ 황금당 진열대

그렇게 오랜 기간 확보해온 단골가족들은, 주인이 창업주 (故)박태용씨에서 그의 아들 박춘씨로 바뀐 오늘에 와서도, 마산 창동상권의 원로자리를 지키는 힘이 되어주고 있으며

오늘날,,창동의 명가로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