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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갈랑교..음악이 있는데

지난 금요일 ~점심을 먹고 잠시 예술촌 골목을 한바퀴 돌았다.

만초골목을 들어서니  봄햇살이 더욱 따땃하게 골목을 감싸고 있다.

햇살이 아까바서 만초집 앞에는  넓직한 빈소쿠리에 수건도 널어놓고 있다.

그 한켠에는 세월만큼이나  낡은 의자에 몸을 의지한 채

조남륭 사장남은  담배를 피우시고 계셨다.

 

난,,평소,아버님이라 했다가 아버지라고도  부른다.

 

" 아버지,, 점심은 잡샀어에?  

아이고 햇빛이 좋은께 나와 계신가베예..

 

"하모~~ 커피 한잔하고 가라..맛있는 거 사놨다."

 

무뚝뚝한 표정이지만,,항상 반갑게 맞이해주신다.

 

오늘은 제가 그냥 온것이 아니고예..

뭐좀 여쭤볼라꼬 왔슴미더..

 

뭔데?,

 

'할머니 여학생이라는 시가 있다면서예.~~.

 

그 머할라꼬?..,오래 된긴데.

 

도시재생신문에 한번 실어볼라꼬예.. 말씀좀 해주보이소~~

 

앉았던 의자에서 일어나 만초로 들어간다.

늘 앉는자리에 몸을 앉힌다.

TV앞  의자에 걸터 앉아 담배를 한까치 다시 피우신다.

돋보기와 메모지, 볼펜을 주섬주섬 찾더니만

 

'이제 다 잊자삤다.. 생각이 날란가 모르겠다'..고 하시더니

한줄한줄 적어내려가신다.

 

< 할머니 여학생>

 

반색하며 손을 덥석잡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그 할머니는

옛날 이웃에 살던

귀여운 여학생이었습니다

 

나는 짓궂었지요

어느새 정들어

우리는 새끼손가락으로

기약없는 약속을 했더랍니다.

허나 부산 용두산에 판자촌은 화마에 재가 되고

수소문 수차례 찾아도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

말없이 걸었습니다.

사는 곳이나 손자들의 안부는

묻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된 그 여학생은

언덕길로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우와~ 우찌,,, 잊어버리도 안했는가베에.. 척척 써내려가시네예..

 

이 시를 쓴 적은 언제쯤입니꺼? ~~15년쯤 됬을끼로.. ..

우짜다가예~

우연히 부산에서 만났다아이가.

지가 알아보데~~

만났기는 했는데

손자도 안부도 못 물어봤다.

그 소녀는 오데 살고 있습니까.

모른다. 넘어(남의) 할매 된 것 물어볼끼 뭐있겠노

그 배경은 오뎁미꺼

부산아이가,,

6.25사변때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 와서 용두산 판자촌에 살았다. 그라다가 15살 때.. 다시 서울로 공부하러가꼬

 

살다보면 그런날도 있니라...

 

 

이 시는 부산일보 신문에 났다아이가... 신문에 나자마자  서울서 어떤 노처녀가

 전화를 해가지고 찾아왔다. 할배 담배사가지고 와서,, 담배푸시라고

말이 끊어지기도 무섭게 몇번을 들어도 지겹지 않은 만초의 이야기보따리를

어무이가 풀어내신다.

 

처음시작한 70년대, 지금 북마산가구거리에 있는 놀이터,(옛,문창교회) 뒷골목에서

 간판은 없고' 베토벤집, '음악의 집'이라는 작은 가게를 하기 시작했는데 클래식을 틀어놓으면

그 음악소리를 듣고 지나가던 많은 학생들이, 예술인들이 들락거렸다.

방학때가 되면 서울로 학교를 갔던 학생들이 내려와

무슨 종이같은데다 정치이야기도 발표하기도 하고

" 아이고 그때는 얼마나 무섭던지...

그리고 학비가 없어 어려워하는 학생들 등록금도 대신 내주고..

말도마라...

 

그리고 지금 코아맞은편 목조건물로 옮겨왔으나(현, 만미정자리)

 3년만에 주인집이 팔려 장사를 잠시 접고...

이것저것,,,많이 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다시,,사람들의 권유에 의해 이곳에 문을 열어 우동도 팔고

해달라는 것 해 줬다.

고전음악의 집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죄다

유명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 예인들 이름이었다.

어무이는  그사람들의 이름을 빠트리지도 않고 술술 말하신다.

조두남, 정진업, 최운선생, 김봉천, 안병억,이선관시인..불이회, 그리고 누구누구..

세월이 흘러도 잊지못하는 이름들이 어머니의 세월속에 모두 담겨 있다.

현재호선생님도 아부지가 마산에 정착하게 했다고 한다.

이사할때마다 박스에 조심스럽게 들고 다녔던 베토벤, 차이코프스키, 토스카라나의

흰 부조 3개는 천정가까이 걸려져 만초를 지켜주고 있다.

 

벽면한켠 가득메운 그때 그시절 사람들..

그리고 고전음악의집을 하면서,, 헤르베르트폰카라얀의 큰 사진을 걸고

클래식을 맘껏 들었던 지역의 많은 청년들,,

세월이 발길을 끊게 만드는  50~60대 사람들의 그때 그시절은 모두

조남룡 아부지, 만초를 잊지못한다.

 

조남륭아부지 이제 나이 78세,

얼마전 허리를 다쳐,영 꼼짝을 못하겠다고 하신다.

어무이도 혼자걸음을 걸을수 없어 테이블을 잡고 겨우 부엌을 드나든다.

 

 

도시골목 어스럼 해가지면 희미한 불빛의 만초가 있다.

"술과 소리가 있소이다. 그냥갈랑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