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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관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바람이 몹시 차거운 일요일 아침 10시..

옛 오동동아케이드 입구. 새롭게 조성된 다리에서 익숙한 이들과 함께 이선관시인의 발자취를

따라나섰다. 아침풍경이 무척 맑다. 바닷물이 생태복원 하천으로 들어와 깨끗하다. 갈매기. 쇠백

로. 숭어새끼(모찌)가 떼지어 노닐고 있다.

 

바다 가까이 내려와 금빛 물결이 이는 아침 바다를 보며 70년대 공장폐수로 인한 썪어가던 바다를

꼬집은 독수대를 이야기하고 옛 수출후문 방향으로 쳐다보며" 번개식당을 아시나

"를 낭송하였다. 배대화 교수님은 침이 마르도록 독특한 시어를 칭송한다. 시인에게서 아무런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다. 캬아~~누구는 산업전사라 부르고.... 공순이를 이렇게 칭하면

서 노동착취를 했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식당 메뉴가 시에 쓰여있듯이 ..1분 막국수 2분 짜장면 3분 김밥...............

관광호텔을 앞질러 어시장 수협길을 향해 걸었다.

수협건물 기둥마다 새겨진 구호마다 정말 우습꽝스럽기만 하였다..무슨 연유에서 이런 발상이

나왔을까,,방제사업으로 인해 등대 주변의 바다는  점점 매립 되어가고 있었다.

어시장을 들어서 옛 천신호 배가 정박된 자리를 향했다. (현.농협자리)

ㄷ자모양의 선창가. 회상,,,,,천신호 가장자리에서 고추만 붙잡고 물에 뛰어든 소년......

계속 발걸음을 이어 옛 문화문고 앞에 닿았다.

제삼의 충격 

거의 매일 들르는 문화문고에서

오늘은 매우 충격적인 문장 한 줄을

읽었습니다

부림공원조성 터에 가서 고모령 시를 낭송하고

청춘바보몰 팟타이 코너앞에 가서 성광집을 기억하고 성광집 아줌마

△ 임화 시인이 골목안집에서 1여년 정도 살았다고 합니다..

오거리,,그리고 부림지하도를 지나 추산동 일방통행길을 따라 이선관 시인이 잠시 살았던

추산아파트  그리고 길목을 가르며 걷는 내내 옛 이야기에 젖는다 

제일 탁구장 맞은 편 골목을 들어서,,,, 쭉 들어가니 ,,마지막 거주지 문이 보인다.

박영주씨는 벽에 있는 못을 지적하면서

이것이 이선관시인의 문패가 달려 있었던 자리라고 이야기 하면서.

배대화 교수를 쳐다보면서 " 문패는 보관하고 있습니까? ,,,,...없는데.... 

골목을 다시 나와 후미끼리,,(기차길을 통과하는 길)..,포교당 뒤길을 따라 걷다가

다시,,옛 강남극장 뒤 좁은 골목을 들어섰다. 이런 골목도 있었나,,,모두 처음이라고 한다.

 

골목을 나서니  대포집이 눈앞에 보인다. 지금은 장사를 하지 않고 간판만.....

창동 입구 신호등을 건너 첫 골목을 들어서서 창동예술촌 골목을 내려왔다.

영록서점 앞에 서서 이곳이 중성동집 중국음식점 야래등 안집이었다고 한다.

내가 사는 방  ...

내가 사는 4만원 단칸방은

중국집 가게로 드나드는 대문 없는 집이지만

내 작은 녀석 말마따나

이 근방에서 마당이 제일 너른 집이지요

봄이 오며

목련꽃이 피고 목련꽃이 피고 지면

복사꽃이 피고 복사꽆이 피고 지면

동백꽃이 피고 동백꽃이 피고 지면

앵두꽃이 피고 앵두꽃이 피고 지면

감꽃이 피고

사시사철 리고 피고지는 꽃을 따라

쑤욱쑥 자라는 대 두녀석을 볼 때마다

떳떳함을 느끼는 나의 방은

두어평도 안되는 단칸방이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년 내내

찾아오는 사람들로 붐비지요

칠순 넘은 나이로 문학 수업을 하시는

할머니도 찾아오시고

스님도 전도사도, 심심하면

대공과 그 양반들도...

내 사랑하는 두 녀석과

함께 사는 나의 방은 정말

사랑을 주고 받는 사랑방이지요

오후에는 창동예술촌 아고라광장에서는 다양한 공연이 진행되었습니다

가을햇살이 따뜻한 오후시간,,, 많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시월의 마지막 일요일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