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 문신예술골목에 있는 정순옥, 박남순작가

" 경년아,,우리 골목은 너무 춥다, 작업실에 햇빛을 전혀 볼수 없어 슬픈데 ,여기 햇빛이 너무 좋다야~~`

두 작가는 따뜻한 봄햇살에 웃음과 수다로 즐거워한다..

일요일,,, 이 골목을 지켜주고 있어 참 좋은 엉가들이다.

 

 

 

▷ 아이고 `~~화장실이 엉망이다..

빗자루 주봐라,,, 여기는 공영화장실이라 이런꼴을 보고 방문객이 얼마나 욕을하겄노,,

정순옥작가는 몸을 아끼지 않고 빗자루를 든다.. 나도 잽싸게 넘쳐버린 휴지통을 비우고

 물을 틀고 빗자루로 쓱쓱 함께  말끔히 청소를 하였다...

역시,,엉가는 마산사람이다..진정한 창동인이고..

엉가 니하고 내하고 ,,이런사람이 서너명만 더있어도 창동예술촌이 얼매나 재미나는 곳이 되겠노 그쟈 ~~아이고 무시라,,,,

공영화장실이라 주말이면 이용하는 사람이 평소보다 매우 많기에 깨끗한 화장실 이미지를 지키기에 어려움이 따른다.

화장실만이 아니다.  골목골목 담배꽁초와 버려진 술병, 쓰레기는 모두 나의 몫이기도 하다.

창동예술촌은 곧 나의 얼굴이라고 늘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곳곳에 마음이 간다.

현장에서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 되려 비난을 받기 일쑤이다.

 

그래서 더욱 주말이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는다..

스스로 골목을 청소하고 꽃을 가꾸고 방문객을 반가이 맞이하면 하루의 시작이

즐겁기 때문이다.

 

 

 

 

 

유난히 봄꽃을 좋아하여 다양한 꽃을 사와서 부용청주상회 작가실앞에는

발길이 저절로 멈춘다.

 

4월26일 토요일 오후 6시 창동예술촌 아고라광장에서 국제연극제 오프닝에 참가한

외국인과 행사관계자들이 창동예술촌을 방문하는 계획에 맞추어

이정희작가의 명상퍼포먼스가 선보이기 때문에 이정희작가는 하얀목련을 소재로,,

그리고 피었다지는 꽃의 비련에 명상음악과 함께 즉석에서 춤과 그림을 그릴것이다.

 

틈틈이 고운 모시에 한떨기 꽃한송이를 그려내는 모습을 보면 정말,, 예술인의 영혼이

깊이 담겨져 있었으며 그녀의 손놀림은  매우 신비롭기도 하였다.

마지막 토요일이 무척 기대되기도 한다..

 

 

 

 

 

 

▷ 무선마이크를 빌려달라고 하여 줬더니 기타반주에 노래를 부르는 청년들,,

현재 창동예술촌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이창근과 그의 친구들,이다..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기타소리에..노래소리에 골목길에 들어온 이들은 잠시 의자에 앉아 쉬기도 한다,,,,

 

 

 

 

 

▷ 창동시민극장의 러브액츄얼리는 지난 12월달부터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 찾고 있다.. 연극공연 시작에 앞서  객석에 자리한 연인들에게

사랑의 이야기를 소재로 분위기를 끌어가는 주최측의 요구에  각각 사연을 작성하고 있는 모습들,,,,

 

에꼴드창동 골목길에 있는 가장인기, 예쁜 커피집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이어주고 있는

' 사랑이그린세상' 마당 한 켠 유유로이 딸과 그네에 몸을 맡기고 흔들거리는 모습을 보고 찰칵!!

 

 

 

 

오전부터 먼 곳에서 온 방문객이 많은 날이다.

창동예술촌만 아니라 시립미술관(문신미술관), 가고파꼬부랑벽화길, 어시장등 주변볼거리까지

설명을 아끼지 않는다.

연인들, 친구들, 부부들이 골목을 기웃기웃거리면 난 어김없이 그들을 반기다.

골목여행 책자와 창동오동동 지도도 꼭 챙겨 드린다.

지금은 진해군항제가 한창이라 여행을 다니러온 방문객이 창동예술촌코스도 빠뜨리지 않고 

방문하고 있기에 더욱 안내를 아끼지 않는다.

오후시간,,대구에서 왔다고 한 40년지기의 방문객을 모시고 예술촌 골목골목을 안내하면서

마산예술흔적골목에서 창동의 옛 문화예술의 풍미가 가득했던,, 사람, 공간에 대한

 흔적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포토갤러리도 들리고,,만초집도 들리고 부림공예촌,,,

오동동 소리길, 요정골목,, 그리고 TV에서 보았다는 성미집까지,,,

가곡부르기를 좋아하시길래 피아노반주도 해드리고,,노래까지 함께 부르는 참으로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부림창작공예촌으로 가는 길목에는 항상 주단가게를 스치는데  미소와 인사를 놓지 않는 나에게

" 아이고 ~ 운동화가 금방 닳겠네요.. 시에서 운동화 사줘야겠네요..ㅋㅋ

창동예술촌 골목해설사로서 일하고 있는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며

나의 영혼이 마음껏 춤출수 있게 해주는 직업이기에 난 오늘도 창동골목을 오고가며

나를 팔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Posted by 창동아지매(골목해설사) 김경년

만초

분류없음 2013.07.23 18:59

 

 

 

창동골목 (중성동) 만초집...

 

골목에서 흔히 들을 수 없는 클래식이 들려옵니다.

많은사람들이 만초를 기억합니다.

많은사람들이 드나들었습니다. 

숱한 세월속에서 지역예인들이, 그리고 만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방처럼 드나들었습니다. 클래식이 울려퍼지는 만초..

 

그렇게 북적이던 사람들은 이미..저만치 떠나갔고... 만초아부지어무이는 오늘도 내일도 밤늦도록 불을 켜두고..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지지난주 부터..만초에 뜨거운 날씨만큼이나 뜨거운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
뜻을 함께 했습니다.
너무도 열악한 환경을...창동예술촌과 더불어 만초집도..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질 수 있도록..
...
뜻을 함께 한 사람들은
사회적경제지원센타 (김용기, 김윤미) 안방 문을 쏵 갈았주었습니다.
마산희망자활센타 (청소용역팀, 도배, 페인트, 씽크대)... 제 며누리가 욕많이 봤습니다.
그리고 청소팀 도배팀, 페이트팀..진짜진짜 말도 못하게 고생했습니다.
묵묵히 묵은때~~확 베껴주었습니다.

그리고
선뜻 협찬금을 내어주신 김장희(화영철강대표),
창동사람들 (김보성상인회장.) 김종철 (부림시장번영회장) 김공양(도시재생편집부장)
김형준 (김형준치과) 정외영(마산미협회장) 김호준 (마산예총회장),감나무집오리,

플라멩코 김준형,  김경년...
십시일반 모아서,, 탁자와 의자도 확 바깠습니다.

창동의 새식구가 된 황원호 목수님도 기꺼이

CD케이스와 부엌찬장도 만들어주었습니다. 

윤현근, 김경복작가 는 디스플레이 재능기부했습니다.

25일 목요일 오후 6시....만초를 사랑하시는 모든 분들을
모시고 비빔밥 한그릇과 써언한 맥주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모두 오셔서 함께 축하해주세요

 

그라고 인자,,

많이많이들  찾아주시야 됨미더..조남륭 아부지 하시는 말씀..

내나이 (78세)..음악이 있고..사람들이 찾아와주고 웃고 이야기라도 하고 있으니,,

건강한거지..음악과 함께 했다는 이것이,,,얼매나 고마운지 몰라 ..

맞습니다..사람과 함께 할수있는것, 음악이 있다는 것..

바로 그것입니더...

 

 

 

 

  공사후...... 실내가 확 밝아졌습니다.

 

 

 

 

 

 

Posted by 창동아지매(골목해설사) 김경년

 

Public/ 페이비 추천 이 사람이 궁금하다

 

상권 살리기에 나선 창동 잔다르크

김경년 마산창동통합상가상인회 간사

 

글 남석형 기자 nam@idomin.com/사진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지난 6월호에 페이스북 창원시그룹(www.facebook.com/groups/feibe) 추천으로

창원시청 온라인홍보담당 임성운 씨 얘기가 담겼다. 이참에 페이스북 창원시그룹 추천을 받아 인터뷰하는 고정 코너를 만들기로 했다. 일명 페이비가 추천한 사람-이 사람이 궁금하다’.

 지난 529일 페이스북 창원시그룹에 추천 부탁 글을 올리자 페이비들이 여럿을 추천해 주셨다.

 이 가운데 김경년 창동통합상가상인회 간사를 첫 번째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 추천된 다른 분들도 이 코너가 폐지되기 전까지 언젠가는 만나야 할 분들이다.

 

 

불교학생회로 기억되는 ‘10

 

김경년(50) 창동통합상가상인회 간사는 자신의 직책과 이름을 새긴 명찰을 목에 걸고서

 옛 시민극장 앞에서 사람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문득 해설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는 최근 오픈한 창동예술촌 쪽으로 안내한다. 걸음이 참 빠르다.

사실 창동예술촌 사무국은 따로 있지만, 찾는 사람들 안내하는 것도 스스로 나서 하고 있다.

초반 반응이 매우 좋아요. 사람 하나 없던 골목이 시끌벅적해지고, 사진 찍는 소리가 들려요.

이런 모습에 가슴이 뛰죠.”

창동예술촌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나서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 사람을 알 시간이다.

김 간사는 지금도 거주하고 있는 추산동에서 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했다.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아이들을 쫓아내기도 했다.

그래도 김 간사의 10대 시절 기억이 나쁘지 않은 것은 불교학생회덕택이다.

저의 10대를 바꾸게 한 것은 불교학생회에요. 6학년 때 포교당 앞 대자유치원에 가끔 놀러 갔는데,

 그때 불교학생회 오빠들이 절에 오라데요. 부처님 앞에 놓여있는 떡 먹는 재미로 갔죠.

 오빠·언니들이 많이 귀여워해 주었죠. 어떤 때는 절에서 먹고 자기도 했어요.

스님한테서는 붓글씨도 배웠고, 법당에 있는 풍금도 쳤죠. 풍금은 학교서 얘들 피아노 치는 거 보고서는 따라 한 건데 곧잘 했어요. 제가 눈썰미도 있고, 음악적 감각도 있고, 좀 못 하는 게 없어요.

 1 때는 아는 언니를 통해 책을 알게 됐어요. 문학적 감성이 10대 때 저를 감싸기도 했죠.”

 

고등학교는 마산여상(현 무학여고)으로 갔다. 그런데 학교 가는 게 반갑지 않았고 결석도 자주 했다. 당시 여상 다니는 학생들은 머리를 양 갈래로 묶었다. 밖에서 봐도 인문계·실업계라는 것이 구분되는 것이다. 그게 너무 싫어 학교에 정을 붙이지는 못했다.

그래도 노래는 곧잘 해 합창반 반장을 하기도 했다. 이때 성악에 대한 꿈을 키우기도 했지만, 아버지·어머니는 대학에 보낼 생각이 없었다.

 

 

돈 벌어야 했던 ‘20

대학에 가지 못한 김 간사의 20대는 돈을 벌어야 하는 시기였다.

오빠는 군대 가고 돈 버는 몫은 장녀인 김 간사 몫이었다. 럭키에서 판촉사원으로 일했다. 그런데 198523살 때 B형 간염에 걸렸다. 간염은 무리하면 수치가 올라가기에 일을 더 하기 어려웠다.

병원 신세를 지면서 일을 그만둬야 했다. 월급 20만 원 받던 때인데 약값이 한 달에 24만 원이나 나왔다. 감당하기 어려워 약을 끊었다. 야쿠르트 하나 먹으며 데려가려면 데려가라는 마음이었다. 다행히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집에서는 돈 벌어 오라는 성화가 이어졌다. 이때 김 간사는 탈출구를 찾는다. 결혼이다.

자꾸 돈 벌어 오라길래 19862월에 가출해 버렸어요. 그리고는 직장 다니면서 알게 된 지금 아저씨랑 그해 4월에 결혼식 올리고 살았죠. 신혼여행도 못 가고 보증금 50만 원·월세 4만 원으로 시작했어요. 금성사 판촉물로 나온 숟가락 이런 거로 살림 꾸리고 그렇게 살았죠. 지금은 빚도 없고, 집도 두 채나 있으니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바깥세상에 눈 뜬 ‘30

김 간사는 상인회 일 말고도 현재 마산YMCA 이사를 맡아 청소년사업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사회활동에 눈을 뜬 건 199634살 때인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 주부 모임에서다.

부모 교육을 받으며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 지에서부터 시작해 소비자운동 및 상담 등으로 활동을 넓혔다. 조금 자신감이 붙자 살던 아파트에 찾아가는 음악회를 만들기도 하고, 꽃길 만들기·놀이터 위험도 조사 등 동네 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마산YMCA와 인연이 닿아 지금까지 이를 통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다양한 교육프로그램, 그리고 사람을 만나면서 마음의 눈이 넓어졌죠. 그냥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조금만 관심 두면 지역사회가 변할 수 있다는 걸 알았죠. 전화 한 통화만 해도 바뀔 수 있는 게 많아요. 이제는 습관화되어서 지나가다가도 눈에 걸리는 게 있으면 그냥 못 지나치죠.”

경남도민일보 홈페이지에서 김경년으로 검색해보면 음악수행평가, 꼭 사인받아야 되나요?’ ‘

합포만을 또 매립한다고요?’ 등 수많은 독자투고 글이 쏟아진다.

 

 

 

창동에 빠지게 된 ‘40

30대 후반, 창동에서 가방집 하던 여동생이 시집을 가면서 가게를 대신 맡게 됐다.

그러던 중 2007년 상인회가 창립되는데 사무실 전화받는 일 정도만 해달라

상인회 요청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하지만 뭐든지 하려고 하는 김 간사 성격에 전화만 받고 있을 리 없었다.

간사 일 맡고 뭐부터 할까라는 생각부터 했죠. 시장경영진흥센터 상권개발팀에 전화해서 창동상권 진단부터 부탁했죠. 그걸 시작으로 200712월 메가라인 극장이 문을 닫자 모두가 창동 상권 다 죽을 거라고 했죠. 그때는 황철곤 마산시장님한테 편지도 많이 쓰고 했죠.”

블로그를 통해서는 경남은행장에게 편지를 띄우기도 했다. 경남은행 예전 본점이었던 부림지점 창동 상인들 통해 성장했으니, 지역사회에 공헌도 좀 하라는 것이 요지였다. 이를 통해 일정 부분 성과를 얻기도 했다.

극장이 사라진 곳에 소극장이 들어서도록 했고, 청소년 문화존을 만드는데도 땀을 흘렸다. 이런 속에서 상인들에 대한 아쉬움도 크다.

나는 4대 보험도 없는 일용직이에요. 그런데도 길에 나가서 창동 온 사람들에게 설명도 하고 안내도 하고 그러죠. 그런데 우리 내부의 신뢰는 너무 없는 것 같아요. 창동에서 장사하면서도 찾는 사람들에게 이곳 좋은 점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아요. 300점포가 스스로 홍보하면서 내부 고객만 잘 잡아도 괜찮아 질 텐데. 에휴, 힘들어요. 하루 열두 번도 더 그만둔다소리를 하죠.”

김 간사 기억에 창동이 그래도 2002년 정도까지는 주말에 사람이 어느 정도 있었다.

“2003~2004년 되면서 찾는 사람이 확연하게 줄어들었어요. 대형멀티플렉스가 들어오면서 연흥극장 같은 오래된 극장이 다 사라지고,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여기 있던 브랜드들이 다 빠져나갔죠. 강남극장 건물이 무너질 땐 정말 슬펐어요.”

이 때문에 여전히 극장을 접목하는 것에 대한 미련을 두고 있다. 과거 창동에는 영화 보러 나온 이들이 많았기에 여기에서 힌트를 얻으려 하는 것이다. 옛 시민극장 건물을 사들여 대한민국 영화 박물관같은 것을 만들고 싶은 것은 아직은 바람이다. 찾는 이들이 쉬고 머물 수 있는 녹지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또 다른 바람이다. 이는 행정의 힘이 필요한 부분이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

20074월 간사를 맡고 나서 지금까지 딱 3일을 쉬었다. 요즘도 눈 뜨면 어느새 창동에 와 있다. 그래도 수요일에는 기타도 치고, 셋째 주 일요일에는 걷는 사람들활동을 한다.

페이스북·블로그 활동도 그의 삶에 활력이 되고 있다. 페이스북 창원시그룹 오프라인 모임에는 과거보다는 자주 얼굴을 내밀지 못한다. 물론 창동에서 모임이 잡히면 언제든지 뛰어나갈 마음이다. 블로그는 개인 이야기가 아닌 역시 창동 얘기를 담고 있다. 점포 소개도 하고, 사람 소개도 하는 공간이다. 여러 글 가운데 사라져간 영화관 이야기는 많은 이로부터 공감을 얻기도 했다.

이렇게 바쁜 김 간사라지만 바깥 일 때문에 집안을 흐트러지게 하는 법도 없다.

엘지전자 다니는 남편은 저녁에 9시나 돼야 들어오고, 뭐 사사건건 참견하는 사람도 아니에요. 얘들도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시간이 있기에 다들 이해하죠. 제가 하는 일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거죠. 바깥 일 할 땐 하더라도 밥 제때 안 차려준 적 없고, 제가 또 요리 솜씨도 뛰어나거든요.”

엄마가 이루지 못한 예술의 길은 23살 딸이 걷고 있다.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다. 김 간사는 스스로 음감이 발달했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피아노·기타·하모니카·아코디언··장구 등 소리 나는 건 다룰 줄 안다. 그냥 소리를 듣고 따라 치다 보니 저절로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제일 잘하는 건 젓가락 반주란다. 어릴 적 아버지의 그 소리를 밤새 들었기에.

김경년 간사는 다시 창동 주제로 돌아와 얘길 마무리하려 한다.

창동은 제 삶의 에너지예요. 들어서는 순간 지나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안녕하세요라는 말이 튀어나와요. 지금 절에 가도 창동 잘되게 해달라고 빌어요. 나중에 창동에 관한 책을 쓰고 싶어요. 이곳 골목·풍경들, 그리고 제가 활성화를 위해 처음 가졌던 마음, 그러한 과정들 말이죠. 창동아지매로 기억되고 싶어요. 몇 년 후 창동에 어느 미친 여자가 해설사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거에요. 멋있지 않나요?”

이날 첫 만남에서 보는 이가 해설사라는 단어를 떠올렸으니, 김경년 간사는 이미 미래에 아주 가까이 가 있는 듯하다.

Posted by 창동아지매(골목해설사) 김경년

올해 첫 탐방이다.

옛 진해를 찾아가는 도시속의 어촌탐방이 오늘이야기이다  

2013년 2월 23일 토요일,

반짝추위는 저만치 물러갔는지 햇살이 참 좋은 오후2시경,  경남대 10.18광장 모임장소로 갔다

한사람이라도 더 왔더라면 차편이 매우 어중간하게 될뻔한 운좋게도 모닝과 마티즈 2대의

정원에 맞춘 인원, 10명이 모였다.

△ 탐방대장 유장근 교수님과 박영주샘이 각각 준비해온 자료를 검토한다.

△ 2010년 제10차에 떠났던 지난 코스와 박영주씨가 준비한 코스를 함께 이어서 가보도록 하겠다는 탐방대장으로 부터 인사말이 있은후 각각 차에 몸을 실었다.

 

진동시장을 향한 좌회전 신호를 넣으면서 차안에서 질문이 던져졌다.

삼진이라면 진동, 진북(지산), 진전(오서)이라고 하는데,,왜 진서라고 하지 않나요 했더니,

진서는 양전(양촌)과 합하여 오늘날의 진전면이 되었다고 한다.

행정개편이 있을때마다 변방의 설움은 늘 이름을 빼앗긴다는 뜻이죠. 지금의 마창진통합으로

창원시가 된것 처럼..

 

진해현 관아를 가기위해 진동을 들어섰는데 모닝차와  서로 엇갈려 주행한 차이로

내가 타고 있던  마티즈 일행팀은  진동면 동촌냇가길로  들어가게 되어 그 덕분에

일요일 정월대보름행사를 앞두고 진동민속문화보존회에서 준비한 달집과 큰줄을 엮어놓은 모습을 잠시 즐기게 되었다.

진해현은 마산합포구 진동, 진북,진전면 일대에 있었던 조선시대 지방행정 단위였다고 한다.

지금부터 시간을 거슬러  옛진해를 알아보자,

 

 

▽ 진해현 관아/현감들의 집무를 보던 동헌

 

▽진해현 관아 중심으로 왼쪽에 위치한 객사는 1985년 불이나서 소실되었고 그 흔적을 말해주는 넓덕한 돌(기단)만 남아있다. 객사는 주로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 혹은 손님들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탐방대장으로 부터 진해현의 역사와 자연경관등 자세한 설명을 듣고 있다.

 

 진해는 고대부터 살기좋은 지역이었다고 한다.

 해안가 군사적 방어지대의 성격이 상당히 강했던 곳이이며 그리고 조선시대의 진해에서

함안으로 가는  교통요지의 주요통로였으며, 거제, 충무등 따뜻한 남쪽 유배지로 인기?있었던 곳이라고도 한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2년6개월동안 이곳으로 유배와서 머물렀던 김려는 진동지역의 풍물과 물고기이야기에 관해 조사하여  우해이어보라는 한국 최초의 어보의 저술을 남겼는데 그 속에

말의 음경과 같은 개불(해음경)에 대한 자세한 모양새 소개글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특히 수산물 집산지로 우산잡곡이란 책에 해산물을 잡는 진해지역 수산업에 대해 언급되어있다.

 

▽ 동헌입구앞에는 제각기 다른형태의  비석들이 세워져있었다.

옆으로 돌아 현재 진동면사무소 마당에 남아있는 동헌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 곳은 조선 순조 32년(1832) 진해현감 이영모가 세운 관아건물로 지방업무를 보던 곳이다.

△ 이 기둥밑을 보십시요,,신기하지 않습니까.  기둥아래 흠들이 분명 생길터인데 이렇게  기단과 딱 맞추어 틈이 없게 세울수 있었는지, 바로 '그랭이질' 이라고 하는 깎는기법을 사용했다는점을 발견할 수 있답니다. 대단한 겁니다.-> 정규식선생님의 건축기법을 설명중..

△동헌 오른쪽에 있는 군령을 출납하는 5칸의 사령청과  뒤 켠의 굴뚝

 사령청 뒤를 돌아가니 어른4명의 팔을 뻗은 둘레를 지닌수령이 200년이 된 푸조나무가

      긴 세월의 역사를 품 위세를 갖추고 있었다.

동헌 맞은편에는 말을 사육하던 3칸의 마방이 있었다.

△ 진해현의 자연경관이 무척  아름다웠다는 것을 한 눈에  알수 있는 우산팔경!!

 

우산팔경(牛山八景)은  우산현 시기에 이 고장풍경을 읊은 시로 작가는 미상이나 오랜 

세월동안 애송되어 내려온 이 땅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며

1999년 2월 진동팔각회원 일동이 뜻을 모아 유서깊은 옛 진해현 동헌 마당아래

시비를 세웠다고 한다.(경남도민일보 참조).

 

 아름답고도 아름다워라~ 구름, 달빛, 석양, 갈대,만조, 가랑비, 종소리여!!!

1. 석문조운 - 우산입구(지금의 태봉앞)에 문과 같이 생긴 바위에 아침 구름이 떠오르는 풍경.

2. 추봉추월 - 교동(동헌)뒷산 소리개 같이 생긴 높은 봉우리에 밝은 가을달이 솟아 오르는 풍경

3. 요주낙안 - 요장 앞바다의 갈대밭에 기러기가 떼지어 날으는 광경.

4. 광암만조 - 광바위(廣巖) 부근 각양각색으로  바닷가에 저물게 밀물이 드는 아름다운 풍경.

5. 연포귀범 - 돛을 단 고깃배가 돌아오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

6. 웅도어화 - 능지머리 바다에 수없이 늘어져 고기 잡는 배들의 등화.

7. 죽전세우 - 죽전(오서리)의 광활한 죽림에 세우 내리는 풍경.

8. 의림모종 - 깊은 산아래 있는 의림사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저무는 종소리.

 

▽ 다시 차에 몸을 싣고 삼진의거8의를 기리는 창의탑, 창의비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 1919년 4월3일은 장날이었다고 한다.

창의탑은 차에서 내려 현장을 보았지만 창의비는 쌩쌩달리는 차도 옆이라 위험하여 자료로만

만날수 있었다.

 

▽ 다음은 1억년전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고현리 공룡 발자국화석을 밟아보기로 하였다.

두발로 걸어다닌 흔적이 너무나 선명한 공룡발자국 화석

누군가 돌틈아래 촛불 밝혀놓은 모습,, 소원성취하세요

  율티마을-> 창포만->

▷ 창포만은 이수인선생님의 < 고향의 노래> 의 배경이라고 한다.

정규식선생님과 함께 노래를 불러보았다.

국화꽃 져버린 겨울 뜨락에 창열면 하얗게 눈서리 내리고

나래풀은 기러기는 북녁을 날아간다.

아~아~ 이제는 한적한 빈들에 서보라

고향길 눈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 고향길 눈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

 소포마을-> 시락마을

△ 동진대교에서 다리를 건너지 않고 오른쪽으로 들어갔다.  왼쪽으로는 잔잔한 물결의 출렁임만 있을뿐 고요함만 깊이 내려앉은  바다가 안쪽으로 뻗어져 있었다. 저 끝은 당항포라고 한다.

 

△ 시락마을 앞바다를 바라보며 박영주선생님으로 부터 소포면 시락출신인

화가 정상복씨의 이야기 한편을 들었다.그는 화가이면서 1950년대 말,  송지식(뻘에 나무를 꽂는 방식) 굴양식을 하던 중  일본서적을 보고 연구를 거듭하여 시락 앞바다에서 수하식 굴양식을

성공시켰다고 한다.

 

마지막 이동지는 정곡마을이다. 77번 종점. 마산의 끝이라고 합니다. 알고계셨나요?^^

 

시간은 벌써 오후5시 50분, 짧았지만 허투른 시간없이 쭉이어진 탐방일정을 모두 마치고

신마산댓거리 영남식당으로 옮겼다.

△ 미식가 유장근교수님의 단골가게라고 한다.. 전화번호 앞자리가 2자리인것을 보니 꽤나

오래 된 곳인것 같다. 가게안은 매우 좁지만 사람들이  가득했다. 평소에도 앉을 자리고 없다고 한다

이 곳을 처음 온 사람들은 푸짐한 아구수육과 해물 가득한 된장찌개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불룩하게 생긴 아구대창의 모습에  " 이게뭐예요" 라고 묻는다..

가위로 뚝뚝 짤라, 살짝데친 콩나물과 미나리를 어울려 초장에 찍어먹는 맛은 기가찬다.

약간의 배고픔이 오는 시간,, 막걸리 한잔으로 도시탐방을 마무리하였다.

 

 

Posted by 창동아지매(골목해설사) 김경년

애들아~ 너흰 몇학년이고? 1학년요~~ 졸업식에 너거는 강당 안가나?  형아들만 가요..

1학1반 이성민 개구장이 같은 친구는 가방에 잔뜩 교실에 두었던 물품을 담고 지퍼를 열어놓은 채 하교를 하고 있었다.

 

오전11시  105회 졸업식이 열리는 시간이 되었다.

 

▲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네예,, 학교에서 준비한 졸업생 선물,, 영한사전입니다..ㅎ

강당입구 벽면을 가득 꾸민, 후배들의 편지, 사자성어까지 인용한 재치가  참 재밌습니다.

 

욱일승천,,사자성어의 축하메세지가 아이답지않은 ㅋㅋ색다르죠~~

▲ 졸업을 축하하러 온 내빈과 가족들이 강당을 가득  메웠습니다.

59회, 61회,66회, 그리고 각 단체에서 장학금과 물품등이 전달되었습니다.

 

▲ 졸업을 축하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는 시간으로 5학년 후배들의 하모니카 연주에 맞춰

4학년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Posted by 창동아지매(골목해설사) 김경년

2월15일 오전 11시..몹시도 바람이 부는 아침...

창원시 여성문화홍보단 30여명이 창동예술촌을 방문하겠다는 사전연락을 받고

코아양과 앞으로 마중을 나갔다.

모임장소는 코아양과 앞이었는데.. 바람 추위탓인지 실내로 들어간  홍보단원들은

그새 입맛을 당기는 커피와 빵에 이미 푹,,, 순식간에 코아양과는 수다로 시끌벅적,..

단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오늘의 예술촌안내를 맡은 골목해설사라고  소개 인사를 하고선

 " 아따,, 예술촌탐방은 뒷전입니꺼? ㅋㅋ 얼렁 드시고 일어나입시더..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 자~ 모두 손들고 지나오이소" 했더니 모두 웃으면서 손을 들고  길을 건넜다.

 

홍보단의 대부분 구성원이 마산사람이어서 창동의 번성기 시절을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았다.

골목 입구에 들어서면서 부터,

창동예술촌의 조성사업 배경을 짧게 설명하고  평소 안내하는 코스로 다니기 시작했다.

 

" 아이고  ~ 우찌 이리 많이 변했노... 정말 오랜만에왔다.

우리가 창원시 문화홍보를 하고 있으면서 창동예술촌을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하면서 오늘 이 시간을 잘 보고 가야겠다고 하였다.

 

가는 곳곳마다,,,고객를 끄덕끄덕,,, 그렇구나,,,

 

배달래 작가실에서는 바디페인티스트의  작품세계, 분단시기에 만든 동.서 베를린을 가르던 경계선 브란덴부르크 문 뒤를 배경으로 우리나라 남북 통일을 염원하는 작가와 모델의 호흡,,그리고  작가의 아들학교(태봉고) 학생들이 하나하나 통일을 바라는 마음을 접은  

종이비행기까지 세심하게 준비한,,  퍼포먼스동영상을 보고는 감동에 흠뻑...

 

골목을 돌아 남해 보리문디 김은진 보리도예가에게서 보리와 복을 부르고 액을 쫒는

우리 항아리에 대한 이야기에 매우 진지하고도 깊은 감동을 받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골목 저골목을 하나하나 둘러보면서

마지막 박미대표의 인사말과  탱고의 한스텝까지...

 

 

창원시여성 문화홍보단은 2008년 마산시 당시

마산의 문화유산 및 축제행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보다 효율적으로 마산을 홍보하기 위해 양성하였고, 현재 통합창원시가 되면서 활동은 계속이어왔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마산합포구청 중 회의실에서 통합2주년을 맞아 한결 발전된 홍보 전략 강구를 위한 논의의 시간을 가지기도 하고 앞으로도 끊임없는 지역문화를 위한 지속적인 역량강화의 교육, 특강, 현장탐방등을 진행될 것이라고 한다. 


 

 

Posted by 창동아지매(골목해설사) 김경년

지난 12월27일  1월3일  1월28일

몹시도 추운날씨에도 불구하고   3번의 골목해설을 맡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창동오동동 상권활성화재단에서 경남대학교 평생학습연구센타에 의뢰하여창동과오동동, 어시장에 숨어있는 예술과 역사를 현장을 함께 다니면서

 ‘해설이 있는 골목여행’. ‘예술촌이 빚어내는 감성리더십’, ‘숨은 문화역사의 길을 가다’,

  ‘식신로드! 낭만의 어시장’ 3가지 코스를 기획해 코스에 따른 전문 해설사와 아동·청소년들이 함께 골목골목을 누비는 투어 프로그램이었다.

30개교 170여 명의 학생들이 신청을 마쳤으며 지금까지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참여한 아이들은 창동예술촌작가들에게 체험을 할수 있는

프로그램을 사전에 예약하여 골목투어를 마치고 나면 작가와 함께

직접 작품을 만들어보는 체험과 완성된 작품을 가져갈 수 있어 매우 만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10곳의 이야기 장소를 만들어서 아이들을 골목으로 안내한다.

가장먼저 창동조대감 앞에 설치되어있는 붉은 조형물앞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간다

 

1.문신의 개미조형-

 

▲황금당지나 왼쪽골목입구를 지나면 한눈에 보이는 붉은 조형물... 문신선생님의 개미 조형물

 

문신선생은 평생을 개미처럼 일하셨고 예술을 사랑하는 열정이 대단하셨던 분이었다.

작고 전까지 개미를 테마로 잡은 것을 보면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이 개미 형상을 끊임없이 연상시키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작가의 어릴 적 성장 배경과 결부시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문신은 마산에서 보낸 유년시절 개미를 비롯한 곤충의 생태 관찰,

동물세계, 바다의 세계 등 자연의 관찰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으며 잠재되어 있던 그러한 어릴 적 경험이 작품 속에 자연스레 묻어나고 있다.

작가의 노트에 따르면 이 작품이 처음 완성됐을 때는 제목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작품제작 후 그의 작품을 구입한 한 여성에 의해

당시 파리에서 4개월간 상영되던 개미를 비롯한 곤충과 벌레의 생태를 다루는 기록영화에 대해서 듣게 된다. 그리고 그 영화 중 개미떼의 습격에 대한 부분을 인상 깊게 본 문신은 자신의 작품이 개미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로써 작품을 '개미'라고 이름을 붙이게 됐다.

<개미>는 문신작품 중에서도 유독 대중의 많은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다.

1968년 처음으로 나무로 개미를 제작한 후 브론즈, 스테인리스]

스틸 등 다양한 재료와 크기로 개미연작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2. 보존이 시급한 남저 이우식 선생님집

 

오락실앞을 지나면 19번 김창수 창동갤러리를 만날수 있다. 그림도 감상하고

바로 골목입구앞 상상의 날개에서 사진을 찍기도 한다. 

 

▲ 저 뒤에 보이는 고딕양식의 하얀목조건물형태...지금은 옛모습만 그대로일뿐,,

조일당 사장님의 모친이 살고 있기에 손을 많이 봤다고 합니다.

 

중성동136번지..골목으로 들어서다보면 고딕양식을 본 딴 2층 목조 기와집이있다.

이 집은 남저(南樗) 이우식(李祐植: 18911966) 선생이

대지 260여평에 정남향을 보고 지은 저택에 한동안 정착함으로써 마산과 깊은 인연을 맺어 정착한 곳이었으나, 해방 후 초대 부산의대 학장에게 넘기고 마산을 떠나고 말았다. 지금은 (조용봉) 전 남마산 라이온스클럽 총재가 거처하면서 원형을 유지하려고 무척 애쓰고 있다 한다(현재, 조일당대표의 모친 거주) 3.15의거 당시는 총상을 입은 청년.학생들이 응급치료를 받았던동병원이기도 하다.

구한말에서 해방될 때까지 경남에서 으뜸가는 이른바 만석꾼이었던 것이다.

그는 항일운동에 적극 가담한 민족주의자였으며 우리글 살리기와 인재양성에도 공헌하였기에

 향토문화사업가로서 크게 부각된 인물이었다.

또한 마산의 원동(元東)상회를 운영한 탁월한 경영인이요, 경남은행 역임한 금융인이기도 했다. 특히 국내유력지 중외일보(中外日報)의 사주로서 언론의 비판기능을 강화시킨 올곧은 언론인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유복하게 자란 남저는 향리에서 한학을 익혔으나 이미 개화에 눈을 떴기에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에서 수학,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인텔리가 되었다.

귀국한 즉시 3.1운동 때 의령.함안의 만세시위를 배후에서 지원. 재력가로 널리 알려진 남저는 국내 유력일간지인 중외일보를 맡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남저가 남긴 업적 중 가장 큰 발자취는 조선어학회에 온갖 열정을 쏟았던 일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극로와 의기투합하여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에 착수한 것은 특기할 일이다. 편찬사업을 하는 동안 편찬자금 16140원과 기관지 발행에 1050원을 투입했으니 말이다. 당시 종로3가 집 한 채 값이 3000원 이었으니 집 여섯 채 값을 몽땅 희사한 셈이다. 한글을 빛낸 인물..

특히 마산에서 값진 일은 뭐니뭐니해도 원동상회에서 활약한 일이다.

원동상회는 부산 백산상회와 쌍벽을 이룬 무역회사로 마산 토박이 옥기환.명도석 등이 경영해 오다 이들이 남저를 영입하자 영업이 아연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 고장에도 남저의 저택을 원형을 살려 복원해.현대 역사관으로 삼는다면 마산의 위상과 존엄은 더욱 높아지리라 확신한다. (경남도민일보 참고)

 

3.낙동양조장

▲붉은 벽돌굴뚝과  공장과 숙소의 옛모습이 남아있지만,,, 양조장이었는줄 전혀 몰랐다.

1932년이후 80년동안 운영을 했던 낙동양조장....옛모습의 양조장을 만들어본다면 새로운 볼거리가 될것 같다.

 

탁주, 약주는 소위 우리 한민족의 국주로서

구 한국시절에는 가가호호 임의로서 양조 하였으나, 일제의 침탈기에 주세를 걷을 목적으로 개인 막걸리 양조장을 면허제로 하였다.

1928년에 당시 마을에 하나씩 있는 막걸리 양조장을 통합하여 당시 6개의 양조장이 면허를 내어 새로운 막걸리 양조장으로 출발하게 된다.

 

합자회사 낙동양조장 -마산부 표정(중성동) 130번지에서

1932128일 자본금 5천엔으로 설립하여 탁주를 생산 판매했다.   회사대표는 이달영

 

'낙동 양조장'의 현황 - 이 건물이 있는 장소는 창동 학문당서점 후문에 면한 골목길로 약 25미터 정도들어가다보면 좌측에 면한 건물이다.

안산도예공방 옆에 철대문이있다. - 지번도를 보면 원래의 필지인 중성동 130번지는 주변 필지에 비해 상당히 큰것으로 보아서, 당시에 공장의 규모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한 필지내에 여러동으로 증축되어져, 전면은 점포로, 그리고 대문 안쪽에 있는 공장과 숙소동은 다가구주택으로 개조된 듯 하다. - 지금의 상태로 건물의 원형을 추정하기는 힘들지만, 굴뚝이 있는 건물은 양조장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같다.

- 막걸리 양조장의 건축적 가치는 굴뚝을 제외하고는 달리 보존할 요소들이 없을지라도, 이 건물이 마산지역 근대기에 있었던 막걸리 양조장이었다는 장소적 상징성을 부여한다면 뭔가 근대기의 추억을 담아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 낙동양조장이 1932년에 만들어진 이래로 80년의 역사를 고이 간직한채, 도시재생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허정도와 함께 하는 도시이야기)

 

 

4. 바디페이티스트 배달래

 

 

이 작가는 특이하게도 인간의 몸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배달래는 마산사람이다. 마산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성신여대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성신여대 서양화가에서 강사로 재직하기도 했던 그녀는 성신여대 아트디자인대학원에서 메이크업 특수분장을 전공했다.

3번의 개인전과 수차례의 단체전을 가진바 있는 그녀는 20년 만에 대학시절부터 소원했던 바디페인팅의 세계에 빠질 수 있었다.

 그녀는 대학 3학년 때 처음 본 베르슈카의 바디페인팅 사진집을 보고 강한 충격을 받았으며,

바디페인팅 예술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베르슈카를 만나 그를 멘토로 삼아 벌써

국내에서는 수 차례의 공연으로, 전시로 독보적인 예술가이다.

 

5. 김은진보리도예

 

 

 

김은진작가의 항아리 이야기가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수 있도록 설명을참 재미있게 한다

주둥이 좁고 엉덩이 펑퍼짐한 도자기.

남근처럼 우둑 솟은 도자기. 아랫굽이 훌쩍 높은 도자기 ,복을 부르는 처녀 항아리.

복을 담는 아지메 항아리. 근심걱정을 담아두는 걱정항아리 .....

우리네 조상들은 이런 다양한 모습의 항아리로 장식은 물론, 액을 막고 복을 담는 정성과 기원을 담았다 한다김은진작가에게 방문하면 도자기의 이야기를 맘껏 들을 수 있다.

 

 

6.  보헤미안 현재호벽화

현재호 작가는 1935년 부산에서 태어나 1981년 마산에 정착했고

2004년 삶을 마감했다. 주로 부산 자갈치시장, 마산 어시장을 배경으로 한 아낙네의 모습을 그렸고 투박하면서도 정감이 가는 그림을 그렸다.

 1935년 부산에서 출생한 현재호 작가는 부모님의 불행했던 관계로 두 살 때 26세의 나이 차이가 있는 누나 현미씨를 따라 만주, 북경, 대련, 상해 등지를 떠돌다 해방 이듬해 당시 아버지가 계시던 부산에서 정착하였다. 고교를 졸업할 무렵 친구로부터 우연히 빌리게 된 고흐의 판화집에서 본 '해바라기', '밀밭과 까마귀' 등의 작품은 그를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뒤늦게 화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독특한 스타일로 민주신보사가 주최한 최초의 민전에 4회 연속 특선을 차지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걸어갔다. 하지만 그림 그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던 그는 방랑의 삶을 살게 된다. 부산, 대구를 비롯해 전국 방방곡곡을 방랑하던 그는 1981년부터 마산에 정착하게 된다. 마산 예술계의 따뜻한 온정과 마산 어시장의 푸근한 풍경이 그를 마산에 머물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들을 보는 순간 낙천성과 인간사에 대한 애정이 강하게 느껴졌다. 마산 어시장에서 장사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을 주 모티브로 하고 있는 그의 그림은 단순하고 투박한 형태들이 화면의 중심에 배치되어 있지만 단절된 것이 아닌 함께 호흡하는 인간 군상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눈을 감은 듯 보이는 시장 아낙네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비롯한 시장 상인들 삶의 애환을 드러냈다. 파스텔 색조의 부드러운 색감, 단순화된 인물형상과 화면 구성은 인간사에 대한 정감 어린 시선을 보여주었다.    - 경남도민일보

 

그냥 지나칠수 없는 마산의 옛 흔적,,,지나는 길목에 현재 남아있는 오프라인 서점 학문당에 대한

 옥호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58년째이어가고 있는..권화현대표의 작고하신 부친의 사진... 아버님의 호가 <문당>이었는데

사람은 늘 배워야한다고 학문당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하였음을...이야기하고 있다.

 

▼창동허새비 이선관시인

마산만의 오염됨을  시사하고 있으며,1970년대우리나라 최초의 환경시 '독수대' 를 발표.

이따이이따이..바다가' 아프다아프다' 는 뜻

 

7. 그랑쇼미에르 서혜주 <식물과 회화의 만남>

 서혜주 작가는 원예치료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왜 원예치료에 관심이 있냐고 물었더니 본능의 문제라고 답합니다.

  식물을 만지든 물감을 만지든 두 개가 하나되어 식물도 회화로 보이고,

  페인팅도 식물로 보게 된답니다. 이 때문에 작품 바탕색은 숲이라고 합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숲 위에 집이 있고 집 위에 숲이 있습니다. 작가의 그림 내면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 환경 문제 해결을 갈망하는 모습이 표현돼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사람들에게 전달을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작업을 하신다고 합니다.

특히,붉은 바탕의 물감은 자연 물감인 분채를 많이 사용하는데,특별한 느낌이 들어 좋아한다고 합니다

'아카데미 그랑쇼미에르'100년이 넘는 전통의 순수미술 사립예술교육기관.

미술데생,크로키를 가르치는 순수미술 .파리 유학을 가려고 많은 유학생이 거쳐 간 예술아카데미이다.

 

 

8. 아카데미 뒤폐 '하니스토리' 윤귀화

 

 

아카데미 뒤페'는 문신이 파리 유학 초기 회화 강사로 일했던 곳..

  윤귀화 작가의 작품에서 빠지지 않는 소재는 ''이다.

"2000년부터 승마를 했어요. 승마체험을 한다고 학생들과 승마장에 갔는데오히려 제가 승마에 빠지게 됐죠.

말을 만나지 않았으면 지금의 제 작품도 없었을 겁니다"고 윤 작가는 설명했다. 그는 지금 경상남도 재활승마협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윤 작가는 지난 2008년 열렸던 두 번째 개인전부터 '하니 스토리(hani story)'를 썼다. 하니는 그의 말이다. 매번 그의 작품에 등장했다. "애마 하니를 통해 저의 내재된 삶을 표현했어요. 하니는 저 자신이면서 관람객일 수도 있죠"라고 윤 작가는 말했다.

그의 작품 속에는 말의 신발인 편자도 있다. 삶의 흔적과 희망을 표현하고,

관람객과 희망을 공유하고 싶은 그의 마음이 녹아있다. 작품은 대부분 화려하다.

검은 바탕의 알록달록한 빨주노초의 색감은 검은 하늘의 불꽃놀이처럼 화려하다.

하늘의 박자에 맞춰 땅에서 선인장, 화초 등 오아시스의 생물체들도 몸을 들썩인다. 사랑과 별, 왕관, 비둘기, 백마, 크리스마스트리 등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에서부터 꿈과 상상의 장면은 작가의 자신감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윤 작가는 "내 작업의 주제는 'I Can Fly'이다.

그곳에 나의 끈질긴 작업의 미학을 둔다. 날고 싶고, 살고 싶고, 이루고 싶은 모두를 담고자 한다"고 밝혔다.(경남도민일보)

 

9. 파리화실 임수진

 

'파리화실'은 문신의 개미시리즈 작품이 만들어진 곳입니다.

임수진 작가의 그림특징은 온통 선이다.

파리유학시절...공부하는 과정에서 리좀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그러한 의미들을  그림으로 나타내고자 마음먹었다고 한다, 현대의 삶의 온통 웹으로 연결되고 있다..관계.....

복잡네트워크에서 어떤 행동방식을 보일 것인가에 대한 밑그림을 처음 그린 사람은 들뢰즈가타리이다. 그 두 사람이 창안한 리좀이라는 개념이 그것인데,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연결망을 표현한다.

그물망처럼 연결된 연결망인 리좀은 어떤 것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땅 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땅 밑에서는 감자, 개밀, 고구마 등의 덩이줄기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두더쥐들의 미로와 같은 땅굴이 얽혀 있다지렁이도 마찬가지다.

복잡한 미로처럼 얽혀 있는 그물망, 매듭과 선, 점들이 이어져 선을 이루고 선들이 마디마다 얽혀 들어가고, 매듭들이 실타래 풀리듯이 뻗어나가고, 끝없이 전개되는 선들의 갈림길,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매듭이 있는데 그것도 중심이라고 할 수 없는 연결의 일부일 뿐인 연결접속의 연속,

……그리고……그리고.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복잡한 미로와 생명의 네트워크가 리좀이다

 

 

10. 이야기갤러리 하모하모 박영경

토우를 시작하게 된 것은 어린 시절 의령에 있는 외갓집을 방학때 면

외할머니와 놀았던 단편적 기억들이 항상 머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고 하며

미대를 가려고 하다가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하였다고 합니다.

 

1996년 이승은 허현선의 부부작가의 엄마 어렸을적에라는 주제를 가지고

한지를 소재로 인형전 전시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게하고

잔잔한 정서를 전해주었던 것을 보고

박영경작가도 15년 전부터 흙 인형을 만들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로부터 배운 적이 없다고 하니 더욱 놀라웠습니다.

 

첫 작품은 단품으로 시작했으나

지금까지 계속된 작품의 특징은 꼭 12점씩 스토리로 엮어 작업을 한다고 합니다. 왜냐면 우리나라의 정서, 옛 시절의 이야기 이고, 달력을 의미하기도 하는 작은 흙 인형이야기는 중. 장년층에는 아련한 추억처럼 지금세대에서는 한편의 동화같은 이야기에

모두들 하모하모 맞다, 우리 어릴 때 저랬다 아이가..” 모두들 잊혀져 가는 기억을 되새기며는시간을 가질수 있답니다.

 

 

 

 

 

 

 

 

 

 

 

 

 

 

 

 

Posted by 창동아지매(골목해설사) 김경년

 

 

 

Public/ 페이비 추천 이 사람이 궁금하다

 

상권 살리기에 나선 창동 잔다르크

김경년 마산창동통합상가상인회 간사

 

글 남석형 기자 nam@idomin.com/사진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지난 6월호에 페이스북 창원시그룹(www.facebook.com/groups/feibe)

추천으로 창원시청 온라인홍보담당 임성운 씨 얘기가 담겼다.

이참에 페이스북 창원시그룹 추천을 받아 인터뷰하는 고정 코너를 만들기로 했다. 일명 페이비가 추천한 사람-이 사람이 궁금하다’.

지난 529일 페이스북 창원시그룹에 추천 부탁 글을 올리자

페이비들이 여럿을 추천해 주셨다. 이 가운데 김경년 창동통합상가상인회 간사를 첫 번째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추천된 다른 분들도 이 코너가 폐지되기 전까지 언젠가는 만나야 할 분들이다.

 

 

불교학생회로 기억되는 ‘10

김경년(50) 창동통합상가상인회 간사는 자신의 직책과 이름을 새긴 명찰을 목에 걸고서 옛 시민극장 앞에서 사람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문득 해설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는 최근 오픈한 창동예술촌 쪽으로 안내한다. 걸음이 참 빠르다.

사실 창동예술촌 사무국은 따로 있지만, 찾는 사람들 안내하는 것도 스스로 나서 하고 있다.

초반 반응이 매우 좋아요. 사람 하나 없던 골목이 시끌벅적해지고,

사진 찍는 소리가 들려요. 이런 모습에 가슴이 뛰죠.”

창동예술촌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나서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 사람을 알 시간이다.

 

김 간사는 지금도 거주하고 있는 추산동에서 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했다.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늘 쫓아내기도 했다.

그래도 김 간사의 10대 시절 기억이 나쁘지 않은 것은 마산불교학생회덕택이다.

저의 10대를 바꾸게 한 것은 불교학생회에요.

6학년 때 포교당 앞 대자유치원에 가끔 놀러 갔는데, 그때 불교학생회 오빠들이 절에 오라데요. 부처님 앞에 놓여있는 떡 먹는 재미로 갔죠.

오빠·언니들이 많이 귀여워해 주었죠. 어떤 때는 절에서 먹고 자기도 했어요. 스님한테서는 붓글씨도 배웠고, 법당에 있는 풍금도 쳤죠.

풍금은 학교서 부잣집 얘들 피아노 치는 거 보고서는 따라 한 건데 곧잘 했어요. 제가 눈썰미도 있고, 음악적 감각도 있고, 좀 못 하는 게 없어요.

1 때는 아는 언니를 통해 책을 알게 됐어요.

문학적 감성이 10대 때 저를 감싸기도 했죠.”

고등학교는 마산여상(현 무학여고)으로 갔다. 그런데 학교 가는 게 반갑지 않았고 결석도 자주 했다. 당시 여상 다니는 학생들은 머리를 양 갈래로 묶었다. 밖에서 봐도 인문계·실업계라는 것이 구분되는 것이다.

그게 너무 싫어 학교에 정을 붙이지는 못했다.

그래도 노래는 곧잘 해 합창반 반장을 하기도 했다. 이때 성악에 대한 꿈을 키우기도 했지만, 아버지·어머니는 대학에 보낼 생각이 없었다.

 

 

돈 벌어야 했던 ‘20

대학에 가지 못한 김 간사의 20대는 돈을 벌어야 하는 시기였다.

오빠는 군대 가고 돈 버는 몫은 장녀인 김 간사 몫이었다.

()럭키에서 판촉사원으로 일했다. 그런데 198523살 때 B형 간염에 걸렸다. 간염은 무리하면 수치가 올라가기에 일을 더 하기 어려웠다.

병원 신세를 지면서 일을 그만둬야 했다. 월급 20만 원 받던 때인데 약값이 한 달에 24만 원이나 나왔다. 감당하기 어려워 약을 끊었다. 야쿠르트 하나 먹으며 하늘이 날 데려가려면 데려가라는 마음이었다.

다행히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집에서는 돈 벌어 오라는 성화가 이어졌다.

이때 김 간사는 집을 나와 탈출구를 찾는다.

자꾸 돈 벌어 오라길래 19862월에 가출해 버렸어요. 그리고는 직장 다니면서 알게 된 지금 아저씨랑 그해 4월에 결혼식 올리고 살았죠.

신혼여행도 못 가고 보증금 50만원·월세 4만원으로 시작했어요. 남편의

금성사 판촉물로 나온 숟가락,이불, 그릇등 이런 거로 살림 꾸리고 그렇게 살았죠. 지금은 빚 하나 없고, 집도 두 채나 장만했으니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바깥세상에 눈 뜬 ‘30

김 간사는 상인회 일 말고도 현재 마산YMCA 이사를 맡아 청소년사업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사회활동에 눈을 뜬 건 199634살 때인 아들이 다니는 YMCA아기스포츠든 주부 모임에서다. 부모 교육을 받으며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먹거리, 소비자운동 및 상담 등으로 활동을 넓혔다. 조금 자신감이 붙자 살던 두산아파트에 마산시 최초로 찾아가는 음악회를 만들기도 하고, 꽃길 만들기·놀이터 위험도 조사,아파트대학 등 동네 생활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마산YMCA와 인연이

닿아 지금까지 이를 통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다양한 교육프로그램, 그리고 사람을 만나면서 마음의 눈이 넓어졌죠.

그냥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조금만 관심 두면 지역사회가 변할 수 있다는 걸 알았죠. 전화 한 통화만 해도 바뀔 수 있는 게 많아요. 이제는 습관화되어서 지나가다가도 눈에 걸리는 게 있으면 그냥 못 지나치죠.”

경남도민일보 홈페이지에서 김경년으로 검색해보면 음악수행평가, 꼭 사인받아야 되나요?’ ‘합포만을 또 매립한다고요?’ 등 수많은 독자투고 글이 쏟아진다.

 

 

창동에 빠지게 된 ‘40

30대 후반, 창동에서 가방집 하던 여동생이 시집을 가면서 가게를 대신 맡게 됐다. 그러던 중 200612월에 상인회가 창립되는데 저는 20074사무실 전화받는 일 정도만 해달라는 상인회 요청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하지만 뭐든지 하려고 하는 김 간사 성격에 전화만 받고 있을 리 없었다.

간사 일을 맡으면서 뭐부터 할까라는 생각부터 했죠.

시장경영진흥센터 상권개발팀에 전화해서 창동상권 진단부터 부탁했죠.

그것을 시작으로 주말마다,그리고 상궐활성화를 위한 여러자료등을 검토하고 방안을 찾기 시작했답니다. 200712월 메가라인 극장이 문을 닫자 모두가 창동 상권 다 죽을 거라고 했죠. 그때는 중소기업청장, 황철곤 마산시장님한테 편지도 많이 쓰고 했죠.”

경남은행장에게 직접 편지를 띄우기도 했다. 그당시 경남은행 예전 본점이었던 부림지점이 창동 상인들을 통해 성장했으니, 지역사회에 공헌도 좀 하라는 것이 요지였다. 이를 통해 셔트만 내려져있고 흉물처럼 방치되어있던 은행을 외벽도색과 함께 365지급기를 설치하며 성과를 얻기도 했다.

 

극장이 사라진 곳에 창동예술소극장이 들어서도록 했고,

마산YMVCA와 함께 청소년 문화존을 유치, 진행하는데도 많은 땀을 흘렸다. 이런 속에서 상인들에 대한 아쉬움도 크다.

 

나는 4대 보험도 없는 일용직이에요. 그런데도 길에 나가서 창동 온 사람들에게 설명도 하고 안내도 하고 그러죠. 그런데 우리 내부의 신뢰는 너무 없는 것 같아요. 창동에서 장사하면서도 찾는 사람들에게 이곳 좋은 점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아요. 300점포가 스스로 홍보하면서 내부 고객만 잘 잡아도 괜찮아 질 텐데. 에휴, 힘들어요. 하루 열두 번도 더 그만 둔다소리를 하죠.”

김 간사 기억에 창동이 그래도 2002년 정도까지는 주말에 사람이 어느 정도 있었다.

“2003~2004년 되면서 찾는 사람이 확연하게 줄어들었어요. 대형멀티플렉스가 들어오면서 연흥극장 같은 오래된 극장이 다 사라지고,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여기 있던 브랜드들이 다 빠져나갔죠. 강남극장 건물이 무너질 땐 정말 슬펐어요.”

이 때문에 여전히 극장을 접목하는 것에 대한 미련을 두고 있다. 과거 창동에는 영화 보러 나온 이들이 많았기에 여기에서 힌트를 얻으려 하는 것이다. 옛 시민극장 건물을 사들여 대한민국 영화 박물관같은 것을 만들고 싶은 것은 아직은 바람이다. 찾는 이들이 쉬고 머물 수 있는 녹지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또 다른 바람이다. 이는 행정의 힘이 필요한 부분이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

20074월 간사를 맡고 나서 지금까지 딱 3일을 쉬었다.

요즘도 눈 뜨면 어느새 창동에 와 있다. 그래도 수요일에는 기타도 치고, 셋째 주 일요일에는 걷는 사람들활동을 한다.

페이스북·블로그 활동도 그의 삶에 활력이 되고 있다.

페이스북 창원시그룹 오프라인 모임에는 과거보다는 자주 얼굴을 내밀지 못한다. 물론 창동에서 모임이 잡히면 언제든지 뛰어나갈 마음이다. 블로그는 개인 이야기가 아닌 역시 창동 얘기를 담고 있다. 점포 소개도 하고, 사람 소개도 하는 공간이다. 여러 글 가운데 사라져간 영화관 이야기는 많은 이로부터 공감을 얻기도 했다.

이렇게 바쁜 김 간사라지만 바깥 일 때문에 집안을 흐트러지게 하는 법도 없다.

엘지전자 다니는 남편은 저녁에 9시나 돼야 들어오고, 뭐 사사건건 참견하는 사람도 아니에요. 얘들도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저의 다양한 활동과 시간이 있기에 다들 이해하죠. 제가 하는 일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거죠.

바깥 일 할 땐 하더라도 밥 제때 안 차려준 적 없고,

제가 또 요리 솜씨도 뛰어나거든요.”

엄마가 이루지 못한 예술의 길은 23살 딸이 걷고 있다.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다. 김 간사는 스스로 음감이 발달했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피아노·기타·하모니카·아코디언··장구 등 소리 나는 건 다룰 줄 안다. 그냥 소리를 듣고 따라 치다 보니 저절로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제일 잘하는 건 젓가락 반주란다. 어릴 적 아버지의 그 소리를 밤새 들었기에.

김경년 간사는 다시 창동 주제로 돌아와 얘길 마무리하려 한다.

 

창동은 제 삶의 에너지예요. 들어서는 순간 지나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안녕하세요라는 말이 튀어나와요. 언젠가 나의 인생후기에 창동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책으로 쓰고 싶어요. 이곳 골목·풍경들, 그리고 제가 활성화를 위해 처음 가졌던 마음, 그러한 과정들 말이죠.

그리고 지역사람들에게 창동아지매로 기억되고 싶어요.

60대에는 지난날 창동에 어느 미친 여자가 창동골목을 누비며골목해설사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거에요. 멋있지 않나요?”

 

이날 첫 만남에서 보는 이가 해설사라는 단어를 떠올렸으니,

김경년 간사는 이미 미래에 아주 가까이 가 있는 듯하다.

 

 

Posted by 창동아지매(골목해설사) 김경년

지난12월 22일 토요일 저녁6시..

마산 창동 가배소극장에서 '동네방네 이야기쇼'가 마련되었습니다.

경남도민일보와 극단마산이 주최하고

경남도민일보 이승환기자와 김민지기자가 사회를 보았던 자리입니다.

이야기 손님으로는 나와 남치성 창동예술촌 입주 작가님이 함께 초대되었습니다.


역시나 SNS페북의 친구들이 아름아름 자리를 메워주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이들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1부시간에 준비된 것은 시사이야기 깔짝시간으로

최근 대선을 끝낸 후 각각 느꼈던 소감 한마디씩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객석으로 각각 마이크를 돌리면서

1번을 찍었던 사람, 2번을 찍었던 사람들,

20대와 50대의 저마다, 아주 짧게, 혹은 긴 이야기들이 먹먹하게 전해졌습니다.

모두는 우리사회와 정치를 걱정하고 기대가 컸음을

다시 한번 느낄수 있었습니다.

 

2부시간에 앞서,

별이빛나는밤에(예술촌22번입주자) 대표의 이상훈님으로부터

오후에 긴급 부탁한 문자메세지를 받고 기타하나메고 달려왔습니다.

무슨자리인지, 뭘하는 사람들이 모였는지 전혀모르고..

그래도 냉큼 저의부름에 달려와서는

"바위처럼,"을 불러주었고 앵콜로

김광석의 노래를 한곡 더 불러주어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본격적으로  저와 남치성작가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창동과 인연을 맺은 이야기부터 창동예술촌의 시작과

과정, 현재의 모습에 대하여 끊임없는 객석의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창동예술촌을 다녀간 시민들의 하소연(불만)을 들으며

그에 변명아닌 진심어린 절절한 답을 하느라 혼쭐이 났습니다.



5월25일 개막된 창동예술촌.

그 이름은 너무나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저에게 크나큰 설레임을 주었으나,,

땅을 파고 점포를 뜯어내고

전봇대를 뽑아내고 간판을 뜯어내고 먼지와 소음속에서

상인들과의 볼멘소리는 끊임없이 높아져 매일매일 민원이 쏟아졌던...

그리고도,,

몹시도 힘들고 부족함이 많은 조건에서 매우 시작이 미약했습니다.

화장실, 쉼터, 표시물하나 없는 이 곳,,

작품전시장 하나 번듯하게 없는 이 곳,

그렇게 무더운날 에어콘이 없이 힘든 공간,

비가오면 물이 새던 공간,

그렇지만 아주 작은 3,1평에서 부터 100평까지 곳곳에 입주를 계약하고

어떤 컨셉을 부응하겠다고 시작한 입주자들..

지금은. 그뜻에, 그 역할에 부응하지 못하고 불이꺼져있고

늘 문이 닫혀있는 모습들을 보면 정말 속이 상하기만 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변명 아닌 현실적 어려움을 이야기만 늘어놓게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과정이든 언제나 어려운 문턱이 있습니다..

이제 8개월이 접어들었습니다.

출발부터 석연찮고 부족했던 구조적어려움이 있었지만

바깥에서 던지는 목소리, 시선을 접어두고

새로운 모습으로 시작하기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는 창동예술촌 입주작가들이

마음을 모았습니다.

앞으로 많은 관심과 애정으로 지켜봐주시기를 염원하며,,

개인적으로

창동의 2020프로젝트를 꿈꾸고 있는 저의 작은 희망도 말해보았습니다.

분명코 문화예술 역사가 숨쉬는 창동, 골목여행이 많은 사람들에게

즐겨찾는 곳으로 변화될것을 그리면서

마지막으로 제가 준비한 노래를 한곡 들려드렸습니다.

 

이렇던 저렇던

어떤 모임이든, 어떤 사람이든, 어떤 단체들이든

창동속에서 함께 웃고 즐기고 모이는 일들이

많아지리라 희망합니다.

참..진행측에서 전혀 생각치도 못한,,

아름다운 가게되살림터를 책임지고 있는 최명간사님이 행사후

남은 에코가방과 선물을 가져와서 객석 손님에게

나누어주는 훈훈한 모습도 무척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많은 사람들과 창동이야기를 ,창동에 바라는 마음들을

함께 나누었던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Posted by 창동아지매(골목해설사) 김경년

 

 

 

 

11월 첫째 주 주말에는 창동과 부림시장에는

시끌벅적 다양한 행사 한마당이 펼쳐졌다.

창동에는 매주 하고 있는 프리마켓가고파와

3회창동허새비축제, 그리고

마산창동청소년문화존이 동시에 진행되었고

부림시장에는 추억의 먹거리외는 그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시장의 기능을 잃고 있던 모습이 늘 지역시민, 고객들에게

안타까움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처음으로 진행되는 제1회한복축제가 시장통을 북적거리게 하였다.

창동과 부림시장은 발걸음을 조금만 옮기면

한 시선 속에 머무는 공간이다. 그래서 더욱 고객동선을 연계시킬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복축제로 인해 아주 오랜만에 한껏 역동적으로 보여지는

부림시장의 풍경을 그려본다.

 

시장입구에는 한복축제를 한껏 상징하는 황금마임 커플이

서 있다. 사람들은 굳은 표정에 꿈쩍 않고 서 있는 모습에

순간 놀라기도 하고 신기한 듯 그냥 지나치지 않고

신기한 듯 사진을 찍고 있다.

 

 

모락모락 김이 연신 오르는 떡볶이가게에도 손길이 바쁘게 움직이고 사람들도 들락날락하는 모습이,,역시 먹거리가 최고인 것 같다.

시장 안으로 쭉 들어가니

목물가게입구에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더니, 행사시작과 함께 자리를 꽉 메운

동네어르신, 상인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한복가게 점주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하였다.

풍물과 난타공연, 부림시장 번영회의 축하인사에 이어

무대 뒤를 비춰주는 오후햇살이 더욱 한복의 맵씨를

덧보이게 해주었다.

아이들의 모습에서, 신부의 모습에서, 어른들의 모습에서

오색찬란한 한복의 자태를 한껏 뽐냈다.

 

 

 

 

 

 

 

 

 

 

 

 

 

 

 

 

 

 

 

 

 

 

1회로 시작된 부림시장한복축제가 내년에도 후 내년에도 지속적으로

행사가 잘 이어져 혼수의 모든것을 주제로 한 특수성을 컨텐츠로

 지역의 새로운 명물축제가 되어

전통이 있는 부림시장, 전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한복축제의

전문시장이 되어야 할 것이며,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들은 물론 외국인들이

찾아올 수 있는 관광명소로 이어질 수 있도록 고유의 전통을 이어가며

젊은 세대들과 함께 우리 것에 대한 사랑이 고스란히

녹아들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Posted by 창동아지매(골목해설사) 김경년
2019년 창원시 문화가 있는날 3회차 이야기

1. 6월마지막 일요일은 새벽부터 부산하였다 5시30 분 알람소리에 길들여진 몸은 깨어나고 어무이 먹거리를 위해 이것저것 챙겨놓고는 새벽바람을 안고 청춘건어물을 향해 달렸다. 북적이는 번개시장에서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

2019골목의 사회학 초등교사연수를 마치고,,

지난 4월11일부터 시작된 창원시교육지원청 특색과제 "골목의 사회학" 5월17일로 교사연수를 마무리하였다, 매일 오후3시 어김없이 신청된 창원시관내 초등학교 교사, 교장, 교감,,,.. 햇빛 뜨거운날, 바람불어 좋은 날, 비 ..

오래된 시간의 흔적, 붉은 담벽이 사라졌다

얼마전,,옛 시민극장 뒤 담벽에 말로만 들었던 문을 보게 되었다, 유명한 배우들이 직접 극장을 찾던 시절, 뒷문으로 빠져 나가기도, 혹은 몰래 도망나갔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던 어른들의 기억으로 뒷문, 개구멍이라고 하였다. 얼마..

5월  창동가고싶데이..

5월 첫연휴 3일동안 창동거리와 골목은 고사리같은 아이들의 손을 잡은 가족나들이가 물밀듯이 드나들었다. 1) 5월4일 토요일 보라색 조끼가 한껏 아름다워 보이는데 정성들여 선물까지 마련한 수프리마켓 샐러들. 부산동아대학교 50..

봄단장하는 마산합포구 동서북13길15

낡고 바랜 작은 건물,,, 알록달록 새단장합니다, 남의 지붕을 타고 작업해야하는 아주 어려운 조건이지만 건물 사방으로 형형색색 새 옷을 입어봅니다. 눈이 즐겁습니다. 봄입니다.

골목정원을 꿈꾸며,,,

2월 마지막날,, 지난해 식목일날 심었던 나무중 시들하고 죽어있는 화분갈이로 동백나무 30그루를 심었다. 나무는 창원시 산림과에 제공받고 운반비는 주머니돈을 내어 마련하게되었다. 오후시간 내내 흙을 쏟아붇고 다시 나무를 심고,..

쿠웨이트박과 함께 한 창동예술촌 골목기행

▼ 2월마지막 일요일,,아침일찍부터 촬영이 시작되었다. 사전에 약속을 두고 준비한 창동예술촌 입주작가 빛내음 김미나 작가. 은팔찌 체험을 하기전에 최주봉선생님과 마치 할아버지와 이뿐 손녀가 소근거리는듯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정겨..

봄단장하는 마산합포구 동서북13길15
봄단장하는 마산합포구 동서북13길15
봄단장하는 마산합포구 동서북13길15
봄단장하는 마산합포구 동서북13길15
봄단장하는 마산합포구 동서북13길15
봄단장하는 마산합포구 동서북13길15